산 자의 땅 Medusa Collection 5
니키 프렌치 지음, 노진선 옮김 / 시작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만약 혼자사는 독신 여자이고, 어딘가로 사라져 한달동안 연락이 없다면, 누가 나를 찾아줄까?
나를 아는 친구들은 그저, 내가 바쁜가보다 하고 생각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매시간 연락하고 살 수는 없으니, 그들이 먼저 연락을 해오더라도 그저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으려니, 또는 어딘가 여행이라도 갔으려니 생각할테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얘기하도록 하자. 2주이상 내 존재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면 좀더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내가 자의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 끔찍한 유괴사건에 휘말려 있을지 모르니까.
전화도 없고, 문자도 없고, 자주가는 커뮤니티나 블로그, 홈페이지등에 그간 움직인 흔적이 전혀 없다면,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추적해달라고.
영국이라는 나라가 참 무섭다. 아니, 무서운 건 영국이 아니라 이 세상인지도 모른다.
2주동안 사람이 사라져 지하에서 결박당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쌓여 정체를 알수도 없는 범죄자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사라진지 몰랐다. 그녀의 친구들, 옛연인, 심지어는 부모님까지도.

니키 프렌치의 강렬한 소설 <산 자의 땅>은 여주인공 애비게일이 기절상태에서 깨어나면서 시작된다.
머리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자신의 정체도, 지금 있는 곳도 확실히 알수 없었다.
그리고는 곧 끔찍한 악몽속에 놓인 자신의 상태를 알게된다. 손발이 결박당한 채, 두건을 쓰고, 자신의 배설물위에 누워 자신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누군가에게 유괴당해 이렇게 지하에서 물건처럼 버려져있다고.
정체를 알수 없는 범인은 간간히 찾아와 물을 주고, 먹이를 준다. 몇일이나 지났는지, 밤인지 낮인지도 알지 못하는 채, 그녀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른다.
차라리 죽자 싶어서 자살하려던 순간, 뜻밖의 탈출의 기회가 찾아와 그녀는 그 악몽속에서 도망친다.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이 사건전에 자신이 어떻게 해서 잡혀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자신을 돌봐주던 의사들과 경찰들은 그녀가 미쳤다고 했다. 한때 옛남자친구에게 맞은 경력을 들이밀며, 지나친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이런 이야기를 꾸며내 도움을 청하고 있는거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여자를 다섯이나 죽인 연쇄살인범에게 잡혀있었는데, 자신이 여섯번째 희생자가 되려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니.
악몽에서 뛰쳐나왔더니 또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고, 그녀가 실종된 약 2주간의 기간동안 그녀의 행적을 찾으려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고, 그저 불쌍하다는 듯이 동정할 뿐이다.
애비게일은 기억나지 않는 사건전 자신에게 일어났을 몇일의 기억을 추적하기로 한다.

몹시 폭팔적인 에너지를 가진 책이었다. 초반부부터 강렬하며 흡인력이 있어서 책을 편 순간부터, 도저히 덮을 용기가 나질 않아서 잠도 자지 않고 다 읽어버렸더니 낮이더라...(....이건 뭐....밤을 샜다고 하기도 뭣하고.....)
책을 보면서, 말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있었던 사실도, 진심도, 세치 혀를 거치면 훨씬 가벼워져 버린다.
모두가 믿어주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추적하는 애비게일의 노력이 눈물 겹기는 했지만, 책을 보면서도 나 역시 혹시 그녀가 정말 미쳐버린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막연하게 막판에 미친여자의 자작극이었소-하는 반전이 나오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기억이라는 건 또 얼마나 모호한가. 매순간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면서도, 매순간 망각의 시간속으로 사라진다.
내일이 되면, 일주일전의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고, 어떤 말을 했는지 거의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데도 꼭 기억해내야할 특별한 순간도 있나보다. 애비게일이 찾던 그 몇일간의 기간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 몇일동안 일어난 일을 알아야 그녀는 범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수 있다고 생각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모두 망각속으로 사라져가는 순간이라고는 해도, 그 순간 순간들이 다음에 올 순간들에 영향을 주고 있었나보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그제 뭘했는지 자세히 떠올려 보려고 하니 그닥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멀쩡히 살아갈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사건을 겪은 애비게일처럼 하루하루 흔적을 추적하며 기억속에 살다가는, 모두 피곤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

추리, 스릴러 소설들이 더더욱 중점을 둬야할 부분은 "결말"보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잘나가다가 결말에서 다 망쳐버리는 소설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나온 추리, 스릴러 소설들을 보면 지나치게 반전의 의식한 나머지, 과정을 모호하게 흐려버리고, 뜬금없이 반전을 펼쳐놓아서 결말을 망쳐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과정이 즐겁다면, 이미 추리, 스릴러 소설은 의무를 다한 거 아닐까.
중요한 건 "누가?"라기보다는 "왜?"니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은 스릴러 소설중에는 이 소설이 가장 강렬했다. 하나씩 밝혀지는 애비게일의 몇일의 흔적, 뜻밖의 이야기들, 첨예한 심리묘사까지, 심리스릴러로 이보다 더 스릴넘치고, 흥미로울수 없어서 말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되더라.
애비게일이 범인을 맞딱뜨리는 순간이 생각보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역시 소설이 계속 그랬듯이 꽤나 강렬하다.

작가 니키 프렌치는 한명이 아니라 두명의 사람이다. 아내인 니키 제라드, 남편인 숀 프렌치의 이름이 합쳐져서 나온 필명이란다. 필명을 여자이름으로 지은 이유는 그들의 첫 공동작품의 주인공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책을 읽으면서 마냥 여류작가의 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남자작가의 박력과 여자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합쳐져서 이렇게 놀랍도록 강렬한 느낌을 만들어낼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작가들의 나약하고 섬세하기만 한 소설을 싫어하는 나로써는 이보다 더 좋을수 없는 소설이었다.
남편과 아내의 공동작업이라니. 그것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아닌 악몽같은 심리스릴러라니. 참으로 독특하신 분들이다.
앞으로 니키 프렌치의 다른 소설들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 부부가 만들어낸 폭팔적인 에너지를 지닌 기억의 세상속으로 다시 한번 빠져들고 싶다.

P.S 다 보고나니 메두사 컬렉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고보니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도 메두사 컬렉션이었는데...
왠지 컬렉션을 하나씩 찾아봐야한다는 의무감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나저나 책 표지 좀.....어떻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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