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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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딕슨 카의 소설을 읽는 것은 "화형법정"이후로 두번째 인데, "화형법정"이 내게있어서는 가장 황당한 트릭을 가진 추리소설 중 하나로 기억되는 바, 그닥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작가이지만, 그저 제목과 표지에 혹해 사게된 <벨벳의 악마>는 꽤 좋은 독서였다.
서두부터 악마와 계약하더니, 2세기전으로 돌아가 과거의 독살사건을 막기 위해 타임슬립한다?
만화같은 설정이지만, 그후 2세기전으로 돌아간 영국의 모습에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한다.
뭐랄까. (굳이 욕하고 싶지는 않지만) 움베르트 에코식으로 역사서쓰듯, 장황하고 세세하게 나열해놓는 것보다, 존 딕슨카의 "아는 것 잘난척 하기"의 수법은 훨씬 교묘하고 현명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기 보다는, 보통 알기 힘든 그 시대의 사고방식, 행동방식, 검술수준부터 시작해 화법에 이르기까지, 현대와는 당연하게 많이 다를 모습들을 이야기에 흥미롭게 녹여낸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도 딱 질색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실의 같지만 다른 모습을 캐치해내는 것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아주 재밌는 역사추리소설이었으며, 매우 유쾌발랄한 활극이었고, 아주 잘 만들어진 만화같기도 했다.

니콜라스 팬튼 교수는 240년전 일어난 독살사건을 막기 위해서, 악마와 거래하고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니콜라스 팬튼경의 몸으로 타임슬립해간다.
이미 독에 물들어 몸이 망가져가고 있던 아내 리디아를 구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리디아가 독살로 죽게되는 시기는 이 시기로 부터 10일후, 예정된 독살사건의 배후를 파해치기 위해 펜튼 교수는 동분서주 하게된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친구들과의 대화- 요즘 남자들처럼 친구사이에 다정한 말따위 하지 않고 욕설로 상대를 지칭하는 것이 더 익숙하며(물론 지금 욕설에 비하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닐듯;;) 슬슬 비꼬면서도 그안에 정을 담아내는 대화들이 참 재밌다.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이 발랄하고 힘이 넘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처럼 전개 역시 화끈하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역사적 지식에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할수 밖에 없고, 아주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 않도록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점 또한 무척 근사하다.

그러나 어째서 존 딕슨카는 항상 뒷끝이 좋지 못한 것일까.
이 작가의 작품을 두개밖에 읽지 않고 하는 말이라 좀 조심스럽지만, 꼭 어느 순간 황당한 순간이 오게된다.
그래도 <화형법정>처럼 트릭자체에 벙찌게 되는 경우는 아니었고, 아주 신선한 반전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밀실트릭 자체는 그럭저럭 수용가능한데, 문제는 마무리. 중반부 이후까지 강렬하고 재기넘쳤던 이야기가 마지막장에서 힘을 한번에 잃어버리고 무너져버리고 만다.
또 남자 캐릭터들에 쏟은 정성만큼, 여자캐릭터들에게는 비슷한 정성을 쏟지 못해서, 소설에서 아주 지대한 영향력을 가져야할 메리의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팜므파탈의 매력이 조금도 다가오지 않을 뿐더러, 그녀의 감정이 호소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내가 소설 초반부를 정신없이 읽어서 캐치하지 못한건지 모르겠지만, 역사에 일어난 수많은 살인사건들중에서 왜 굳이 그 사건으로 돌아가 리디아 독살을 막아야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뒷부분에 뭔가 운명적인 해설이 나올줄 알았는데 그대로 끝나버리더라.)
여러가지 필연성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쉽고, 쓰다말아버린 것 같은 뒷부분도 아쉽다.

독창성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적 매력은 차고 넘쳐 흐른다.
분명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고 푹 빠져들었는데, 내가 딕슨카 홀릭이 되기에는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다음에 만나게 될 작품이 기다려지기는 하는 작가, <부러진 경첩>도 조만간 읽어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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