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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
아마노 세츠코 지음, 고주영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미스테리 소설과 일반 소설의 차이점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는 어떤 소설들을 미스테리 소설이라 부르고, 어떤 소설들을 순수문학이라고 부를까. 매니아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 일개 독자의 입장으로써 그것이 언제나 내게는 미스테리였다.
모든 소설은 미스테리를 간직한다. 주인공이 어떤 성장과정에서 자랐고, 그래서 어떤 성격과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고, 이 이야기에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초반 10페이지내에 모두 서술된 소설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나씩 밝혀지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이 간직한 비밀들, 그 조각조각이 모여서 커다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모두 "미스테리"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만나 30분만 얘기하면 그 사람의 성격부터 성장배경, 살아온 이력을 모두 알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 사람의 말투, 행동거지, 얼핏 들어온 살아온 방식으로,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추리해나가는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고, 미스테리는 있다. 사람도 그렇고 소설속의 주인공도 그렇다. 소설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소설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 비밀, 그 미스테리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라고-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알아가는 설레임과 비슷하다. (물론 다 알고났는데 매력없는 사람이 있듯이 그런 소설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면으로는 거의 모든 소설이 미스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미스테리 소설과 순수문학의 차이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끔씩 추리, 미스테리 계열소설들중에서 "어라, 이건 추리소설이 아니잖아?"하는 말을 종종 듣곤 하는 소설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의문에 나는 여전히 "그래도 이것 역시 미스테리"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같은 경우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배후를 하나씩 추적해나가긴 하지만, 사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고, 그 추리자체가 스릴넘치는 것도, 뭔가 예상치못할 깜짝 놀라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 성격의 이중성, 추악함과 그것이 만들어낸 기이하고 불쾌한 사건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그것은 "미스테리"였다고 규정하고 싶다.
왠지 서론이 길어졌지만,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 역시 그런 소설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소설 역시 나는 미스테리라고 규정하고 싶다. 왜냐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얽힌 여러가지 사건들이 등장하니까. 단순히 생각해서 그렇다.
주인공 쿄코는 남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여자이다. 부잣집 딸로 자라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삼촌손에서 매우 부유하고 완벽하게 자랐고, 얼굴 예쁘고, 옷 잘입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하고, 그만큼 자존심도 쎄다.
단 하나 그녀에게 단점이 있다면 그녀가 불임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프라이드를 목숨같이 여기는 여자가 남들 다 하는 거 하나 못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치부이겠는가.
그런데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전화속의 여자는 자신이 남편의 내연녀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단다. 게다가 요리하나 못하는 무능력한 마누라라고 비난하며, 심지어 집으로 모자 건강수첩까지 보내면서 쿄코의 자존심을 긁어놓는다.
그래서 쿄코는 결심한다. 그 여자를 죽이기로. 살인까지 결심할 정도로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집에 있던 농약을 이용해 그여자의 집에 몰래 잠입해 오렌지주스에 농약을 탔고, 그 결과 뉴스에서 죽은 내연녀 마유미를 보게된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이런데, 책장을 거듭할수록 이야기는 더 복잡하게 흘러간다.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느꼈다고는 결코 말할수 없으나, 간결한 듯 뛰어난 심리묘사(사실 자존심 좀 상했다고 살인까지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불능이긴 하지만, 읽다보면 이런 여자라면 그럴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와 납득이 가는 소설속의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것이 무척 흥미로워서 책이 빨리 끝나버릴까 조금씩 아껴읽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우연으로 밝혀지는 사실들이 너무 많은 점과 거의 완벽해보이던 완전범죄에 예상치 못한 목격자가 지나치게 많이 드러나는 점이 아쉬워서, 그 점에서는 작가가 생각이 좀 짧았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이것이 작가의 처녀작임을 감안하면 이 정도면 무척 훌륭한 짜임세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이 무척 재밌었던 이유는 독보적인 주인공 쿄코의 캐릭터 때문이다.
완벽하고, 독하고, 자존심이 지나치게 쎈 여자. 완벽한 여자이면서 팜므파탈인 이 이미지는 여자로써는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까 싶다. 남자 추리소설작가들이 지은 책에 등장하는 팜므파탈과 여자 추리소설 작가들이 지은 책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비슷한듯 하면서 몹시 다르다.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그려낼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래서 여자가 보는 여자작가들의 팜므파탈은 무척 음습하고, 더 농밀하게 악랄하면서도, 그 점이 매력적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은 책 제목 "얼음꽃"이라 부를수 있는 쿄코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괜찮은 여자작가를 만났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특히 일본 여자작가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지나치게 여성성에 기댄 여자캐릭터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 독특하게도 이런 악랄하고 한편으로는 고독한 여자 주인공들을 만나면 기뻐서 가슴이 뛴다.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결국은 나약한 여자일뿐인- 그런 캐릭터들은 이제 좀 질린다. 사실 여자는 좀더 복잡한 존재가 아닐까. 질투와 허영과 악의를 가진 소악마이면서도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는 과감이 희생을 할수 있는 천사, 양면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는 복잡다난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얼음꽃>의 작가 아마노 세츠코는 60대에 데뷔했다고 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
몇년이 걸리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시간을 돌고 돌아서라도,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지 아니한가.
즐거운 소설이고, 여자들이 읽으면 더 즐거울 지도 모르는 소설. 앞으로도 작가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