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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소설 - 하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은 참으로 특이하게도 전해들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또 전해들은 작가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 독특한 형식의 이야기이다. <본격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쓰기시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1권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작가가 이야기 자체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야기까지 거론하면서 지나치게 뜸들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 설명이 재밌었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인으로써도 일본인으로써도 존재하지 않는 어중띈 상태에서,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고국 일본에 대한 동경을 가진 소녀가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소소하다면 소소하겠지만, 작가의 추억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은 쏠쏠한 재미가 있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뛰어들어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써낸다-는 설정이 진짜 일지, 아니면 소설적인 장치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것 같다.
이 책을 보게 되는 독자 역시도, 미즈무라 미나에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 3자의 입장.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선가는 벌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본격적인 이야기는 작가가 밝히는대로 에밀리 브론테가 쓴 단하나뿐의 소설 <폭풍의 언덕>과 비슷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잣집 아가씨와 가혹한 과거를 가진 미천한 신분의 남자의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이야기와 복수.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기피하는 그 뻔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대대로 부유하게 살아온 가족내력탓에 귀족같은 삶을 타고난 요코 아가씨와 전쟁후 만주에서 건너온 가난한 집안의 업둥이 천덕꾸러기 자식 다로가 그 주인공이다. 정많은 요코의 할머니와 역시 인정넘치는 우타가와가의 가정부 후미코의 도움으로 친해진 요코와 다로가 친구도 없이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방치된 채 보낸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또다른 자기자신과 함께 있는 듯한 안락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당연하겠지만, 상류층 집안의 자제인 요코와 근거도 확실치 않은 다로가 이어지기란 힘든 일이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자신을 짓누르는 신분의 미천함이 다로를 더 비참하고 강하게 만들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요코와의 사랑이 몇번이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열등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다로는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하기 시작했지만, 그후에도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로가 다시 요코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결혼해 딸 하나를 낳은 어머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지만, 오히려 나는 읽으면서 사랑이야기보다는 그 시절 일본 상류층의 풍경 같은 것을 볼수 있는 것이 더 재밌었다. 똑같이 가난해도 그 가난에는 급이 있고, 똑같이 부유해도 그 부유함에는 "근본"에 따른 급이 있었던 시절, 전근대적이면서도 한펴으로는 우리나라의 어느 시대와 닮아있는 것은 동양 특유의 핏줄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일까.
그런 시절의 부유층에 대한 이야기들을 너무 농후하며 퇴폐적이고 속물적으로 그려내지 않은 것은, 오히려 그런 옛 부유층들에 대한 동경 비슷한 것을 책을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것은, 작가가 그 시절 일본이 아닌 미국에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빠져살았던 소녀시절의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는 전쟁이후의 일본을 소설에서밖에 알지 못하고, 그 소설에 등장하는 부유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나름 동경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전후세대를 일본에서 그대로 산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옛 부유층들을 바라보았을런지도 모를 터.
나른하고 기품있는 그 시절의 부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옛 앨범에서 그 시절의 사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묘한 향수가 느껴진다.
소설자체는 재밌어서 요즘 소설처럼 급한 마음으로 읽지 않아도 차근차근 가족과 지나가는 시대의 역사를 되짚어 나가는 재미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의 삼각관계 주인공들중에 아즈마 다로 이외의 두명의 주인공의 캐릭터가 약한 것이 조금 불만이다. 특히 요코의 남편같은 경우에는 질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나치게 이해심이 많은 남자로밖에 느껴지지 않아서(사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그가 게이가 아닐까도 의심하였다;;;) 본격적인 사랑의 종결이 시작되는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들에 비해 긴장감이 너무 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여자주인공 요코가 너무 싫었다. 나이가 들어 중년 여자가 되어서도 옛사랑과 지금의 남편 어느 한쪽도 놓아주지 않고, 미안하다는 생각도 조금도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하는 떼쟁이 여자에게 갈수록 비호감만 느껴질 뿐이더라. 어째서 이런 매력없는 여자의 어떤 점에 끌려서 저마다 스펙 빵빵한 남자 둘이 걸려들었는지는 나로써 의문이다. 물론 소설이니 어떻든 상관없지만, 여자주인공을 조금 더 호감가게 만들었다면 좋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래저래 해서 중반부까지는 즐겁게 읽었는데, 후반부쯤에서는 맥이 풀려버린 느낌이다.
막상 주된 이야기인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에서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지나간 역사에 대한 반추들이 참 재밌었다.
약 7,8년전, 어린 시절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이 생각나서 책을 사다가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본격소설>을 보고있으려니 <폭풍의 언덕>이 헷갈리더라.
그래서 이 책을 덮은 후에 다시 <폭풍의 언덕>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능력있는 작가라해도 역시 원작만큼의 감동은 주기 힘들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