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야회 미스터리 박스 3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방대한 분량의 소설인 "제묵의 야회"를 다 읽고 덮으면서 아득한 피로감을 느꼈다. 두꺼운 책을 사랑하는 나로써, 고작 600페이지 조금 넘는 소설을 읽는 것에 에너지를 다 소비해버려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아마도 책을 보면서 주인공들이 지쳐나가듯이 나도 지쳐나갔던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섬뜩하고 복잡한 존재인지, 동물처럼 간단명료하게 삶을 살아낼수는 없나-라고 생각해도, 단순히 삶을 영위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슬프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오랜만에 읽은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의 소설이었는데, 두꺼운 분량과 녹록치 않은 사건의 스케일덕분에 완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소설이기는 했지만 그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보장한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에 결말을 기다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시작은 어느 하프연주자의 손목부터이다.
"범죄자 피해가족 모임"을 돌아오던 두명의 여자가 살해되고, 한명은 손목이 잘린 채, 또 한명은 머리가 파손된채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해나가던중, 머리가 파손된채 죽어있는 메도리마 미나미의 남편의 존재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게된 형사 오코우치는 그녀의 남편 메도리마 와타루를 조사하기로 하지만 이미 그는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아내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로 온 남자는 경찰서의 아무것도 만지지 않은 상태였다. 즉, 자신의 지문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또 아내의 죽음 이후 경찰이 찾아갔을 때에도, 몇년간 살았던 가정이라 불뤼우는 집에서도 그의 존재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프로페셔널의 솜씨. 행방이 묘연한 메도리마 와타루의 존재감이 궁금한 가운데, 두 여자의 살인 사건후에 증거는 없지만 심증만으로는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난다.
용의자로 지목된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인 나카조라고 하는 인물은 19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학교 친구의 목을 잘라 교문위에 올려놓았던 이상한 엽기범죄자 소년이었던 나카조는 청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처벌받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투명한 친구"가 있고, 그가 자신을 부추긴다고 말하는 소년의 말은 당연하게 정신이상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을까. 사건이 일어난 19년후에 나카조의 담당정신의였던 정신과의사의 제자가 이 사건의 풀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잘려진 손목, 함께 살해된 여자, 존재감조차 알수없는 프로페셔널 킬러, 19년전의 엽기살인사건, 19년전의 사건에 반기를 든 심리학자, 그리고 성실하고 집요한 전형적인 형사 오코우치. 이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제물의 야회>는 형사 오코우치처럼 끈질긴 근성을 가지고 봐야하는 소설이다.
이 모든 사건에 연관성은 분명히 있어서, 차근차근 사건을 제대로만 이해했다면, 어느 순간 연결고리가 나타난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결국 밝혀지는 범인의 범죄동기가 그동안의 스케일에 비해 약하게 드러내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정도라면 충분히 이름을 남길 만한 꼼꼼하고 멋진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소설속에 등장하는 "메도리마 와타루"라고 이름을 댄 프로페셔널 킬러의 매력에는 누구나 빠져들게 되지 않을까.
지극히 이성적인 차가운 얼굴뒤에 감추어진 파란만장한 성장과정과 아내를 죽인 범인에 대한 복수에의 집념은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봐도 실망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또, 메도리마 와타루와 그의 파트너 후루야의 대화는 어딘지 한없이 슬퍼져서, 읽다가 숨을 한번씩 몰아쉬게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할줄 모르는 무미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관계이면서도, 세상에 믿을수 있고 의지할수 있는 사람이 둘밖에 없기 때문에, 말 하나하나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살인자이면서도, 그 살인에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메도리마 와타루에게 단지 그것이 일이기 때문인데, 이점은 종국에 밝혀지는 "투명한 친구"인 남자의 살인동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살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 것과 "호기심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 다르지만, 범죄인 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심연을 너무나 응시한 나머지 심연에 먹혀버리는 범죄자의 살인동기보다는 그나마 납득하기 쉽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위해 사냥꾼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터이다. 어떤 사람은 동급생을 엽기적으로 죽이고도 잘 먹고 잘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 없이 살해를 선택했을 따름인데도 평생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이런 식으로밖에 질수가 없어서, 결국은 킬러가 되어버렸다.
불합리한 삶과 세상, 소설속에 등장하는 이 사회의 모순을 언젠가는 제거하고자 더 끈질기게 살아남기로 한 오코우치의 의지에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메도리마는 사람을 죽인뒤에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살아가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고 킬러를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아니지만..)
사람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부분에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책임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떠한 감정도 어떠한 집착도 삶에 의지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코우치는 책임을 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또다른 살인자인 나카조는 자신을 책임지지 못해 죽음마저 타인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투명한 친구"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아예 희박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면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름과 존재을 책임지지 않고,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삶을 살것인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어가는 삶을 살 것인가. 그래도 아직까지는 후자를 택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기자신에 대한 애정과 주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스릴러 특유의 정교한 범죄심리분석, 결코 급하지는 않지만 차근차근히 치고 들어가는 서스펜스, 남녀의 애달픈 사랑이야기까지 다루고 있는 묘한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느와르, 경찰소설, 연애복수극, 스릴러-뒤섞여있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대로 막판에 반전을 등장시키려 하는 노력이 그닥 보이지 않아서 좋았고, 사건이 방대한 만큼 섬세해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아픔이 있어서 좋았다.
집필기간만 6년이 걸렸다던데, 그만큼의 재미는 보장하고 있는 소설이다.
앞으로도 이 이름도 생소한 작가 "가노 료이치"의 새로운 소설을 보고싶다.
올해에는 즐겁게 읽은 일본소설이 얼마 없는데, 얼마전에 읽은 "도착의 론도"와 함께 내게는 올해 가장 재밌었던 일본 미스테리 소설이 될 것같다. 아니, 오히려 <도착의 론도>보다 더 무게감이 있어서 오히려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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