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여행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그는 소설가였다. 2년동안 집필한 소설을 들고 자신과는 먼친척관계인 편집장을 찾아가 상담하던중, 이 소설이 너무 형편없어서 출판되기에는 모자라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웃으며 출판사를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 형편없는 소설을 보았고, 출판사를 나오기 직전 했던 생각을 실행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편집장 야콥 뢰더의 별장으로 찾아가 그날 밤 그를 죽인다.
그의 소설이 형편없고, 이 상태로는 출판할수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 친척이자, 그간 자신을 돌봐주었던 편집장 야콥뢰더를 죽인 이유는 겨우 그정도였다.

그 살인후,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프라이킨의 자서전 집필을 하기로 하고 프라이킨의 저택으로 간다.
키작고 나이든 노인. 멍청할 정도로 인정많고 착한 그 배우에게는 손녀벌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모든 것은 그의 기대에서 엇나갔다. 부유하고 명망있는 배우에게 빌붙어 재산을 노리는 거겠지 싶었던 그의 아내 사라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했다.
웃기는 일이다. 젊고 똑똑하며 야망있는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 이 늙고 멍청한 노인에게는 다 갖춰져있다.
이 남자 마크 크라머는 프라이킨의 자서전을 집필하기 위해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자서전은 안중에도 없고, 프라이킨의 아내 사라를 유혹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 노골적인 유혹에도 사라를 제외한 누구도 그의 수상쩍은 행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사라를 향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프라이킨을 살해하기로 한다.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야간여행>은 독서후에 깔끔하게 정리된 뒷맛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반길만한 소설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살인동기가 될만한 큰 이유없이 자신의 욕망이나 한순간의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 범죄에 대한 마땅한 죄를 받는 것도 아닌 이 살인자를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소설의 첫페이지를 펴는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이 소설에 완전히 반해있었다. 소설이 주는 불편함이 매력이라면 매력인건지, 해피엔딩 동화처럼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되고 주인공의 심경을 모두 이해할수 있는 소설보다, 이런 불편하고 애매모호한 느낌이 내 구미에는 더 맞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간 여행>의 주인공 마크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사소한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
이 심사가 베베꼬인 못된 남자를 바라보면서, 작가가 주인공에게 부여한 살인동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살다보면 그런 사람 만나지 않나. 겉으로는 젊잖은 척, 착한 척, 예의바른 척 하지만, 속으로는 남을 비꼬고, 질투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 말이다. 마크 크라머는 일종의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은 젊고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고 헐뜯지만, 사실은 컴플렉스를 느끼는 사람이 아닐까.
마크가 찾아간 프라이킨과 그의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고 명성도 있는데다가 심지어는 착하고 인정까지 많다. 어디서 찾아온 사람이 집에 머물러도 금새 마음을 열고, 의심하는 법도 없다. 마크가 보기에는 참으로 멍청하고 가식적인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가진 여유를 사실은 부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그 천사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자신의 오점과 추악한 본성이 더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행복을 깨어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이는 너희들도 언젠가는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게 될것이라고- 바랬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청년은 범죄로까지 발전된 실수를 저지르고서야 비로소야 깨닫는다.
자신의 소설을 형편없다고 말한 야콥 뢰더의 본심을, 그리고 가식적으로 보이던 프라이킨의 호의를, 뒤늦게서야 알게된다.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어둠을 이겨내고 싶었던 청년은 결국 어둠에 지배되었다.
책속의 마크 크라머를 바라보면서,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럼에도 찝찝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 있다.
욕망과 질투와 끝없는 불신과 마음속의 어둠에 집어 삼켜진 나약한 남자.
그 못되먹은 마음이 새삼스레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못되먹은 마음을 품어본 적 없는지 반추하게 되었는데,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더라.
나쁜 마음도,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검은 욕망도, 결국은 깨끗히 해결나지 않고, 누구도 몰라도 자신만은 죽는 그 순간까지 간직하게 될 어둠이 되어버린다. 그는 법적인 책임은 지지 않았지만, 그 어둠을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다. 처벌도 없지만, 구원도 없다. 그 점이 현실적이고 불편하다.
마지막 한장을 덮으면서 검고 깊은 우물속에 침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얀 코스틴 바그너의 처녀작으로는 놀랍다고 생각한다. 읽으면서는 얼핏 아멜리 노통브를 떠올리기도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보다는 수준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멜리 노통브처럼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기에 그치지는 않는다.)
별 생각없이 읽었다가 푹 빠져든 너무나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불편한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소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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