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순간
빌 밸린저 지음, 이다혜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한 남자가 목이 잘린 채 어느집 문앞에서 발견된다.
다행히 죽을만큼은 아니었는지, 목숨만은 어렵게 구한 그는 목소리와 기억을 잃고 병원에서 깨어난다.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자신이 그리 평범하고 착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는 희미한 느낌만 남아있을 뿐이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지할 가족도 없고, 병원을 나가면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큰 걱정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정석이라 몸에 배어있는 듯이, 그는 자신이 버려졌던 집으로 찾아간다.
그의 등장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그에게는 두려움이란 없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청산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려고 할 뿐.
냉혹하다기보다는 무덤덤한 사람, 주인공 퍼시픽은 그런 사람이다.

또다른 곳에서 목이 잘린 채 죽어있는 사람이 발견된다. 이번에는 진짜다.
경찰들은 이 신원도 모르는 시체에 당혹해 하면서 그의 과거를 찾아나간다.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만이 알수있는 사실-이 시체는 주인공 퍼시픽의 시체이다.
목이 잘린 채로 살아남아 자신의 과거를 찾는 퍼시픽은 왜 다른 곳에서 시체로 발견된걸까.

빌 벨린저의 <기나긴 순간>은 지금까지 보았던 소설들대로 두가지 이야기가 겹치는 지점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최근에는 교차서술이 많아졌고, 또 이런 방식의 교차서술을 빌 벨린저가 또다른 소설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마지막 반전을 운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실 결말 봉인봉 역시 <이와 손톱>에서 그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추리소설 독자로써는 "결말 봉인본"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매력을 거부할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신선했던 결말 봉인본이 한번의 신선함이 깨지고 나면 조금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고 만다. 실제로 나는 읽다가 결말 봉인본 부분에서 짜증이 나서 결말 봉인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사실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되었던 <이와 손톱>이나 <연기로 그린 초상>에 비해서는 조금 지루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반전을 알아챌수 있는 것은 그렇다치고, 서술은 여전히 술술 잘 읽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몰입할수 없게 만들어서 이 짧은 책을 조금 더디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줄까지 다 읽고 나서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은 어쩔수 없나보다.
자신의 과거는 모두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자기자신은 찾지 못했던 이 영리한 듯, 바보같은 인물에게 동정이랄지, 비애랄지 하는 것이 느껴져서 마지막 한줄에서 기분이 굉장히 이상해졌다. 아마도 이런 매력때문에 이 소설이 다소 실망적이었는데도 빌벨린저 작가자체에 실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책이 출간된다면 또 읽고싶은데, 출판사에서 빌벨린저 3종세트에서 그치는 점이 좀 아쉽다.
이런 작가를 만나기도, 요즘은 흔치 않아져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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