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밀리건 - 스물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다니엘 키스 지음, 박현주 옮김 / 황금부엉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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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심리학자들은 '신들린 사람'들을 지칭하여 해리성정체장애 얘기를 하곤한다.
나 홀로 생각해보건데, '신들린 사람'과 일명 '다중인격'이라 불뤼는 해리성정체장애자들과의 차이점은
그들에게 다중 인격 이상의 다른 능력-예언을 한다던가, 타인을 꿰뚫어본다던가 하는 능력의 유무라고 생각하는데,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들여다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이 정신의 문제인지, 외부적인 신들림이 존재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믿음의 차이이다.
신들린 사람들의 자신안에 귀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거나, 또는 그것이 다중인격이라 믿는 것이나-
초자연적이던, 현실적이던, 그것의 진실여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믿음의 차이에 달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말을 얼마나 믿을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24개의 인격(자신은 그것을 '인격'이 아닌 '사람'으로 지칭해주기를 바라지만-)을 지닌 빌리 밀리건이
진짜 해리성정체장애로 고생하는 정신병자인지, 천재적인 연기력을 가진 사기꾼인지 확실히 알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어린 시절 의붓아버지로부터의 폭행이 존재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점 역시
당사자들이 아닌 이상 정확히 알수 없다.
사람의 말을 얼마나 믿을수 있는가, 내가 사람의 말을 얼마나 믿는 사람인가.
나는 과연, 빌리 밀리건의 말을 믿고 있는가. 단지 동정심으로 그를 믿어보려 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사람들이 모두 손들어주는 진실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여러가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래도 책을 보는 내내, 빌리 밀리건의 말에 집중을 할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할 거예요. 이 일은 점점 손쓸 수 없게 되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빌리가 학교 지붕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이후로 계속 그애가 살아있을수 있도록 해왔습니다."
(-p68)

 
시작은 어쩌면 평범했다.
놀아줄 사람이 없던 외로운 어린 아이가 상상속의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빌리에게는 크리스틴이라는 3살짜리 여자아이의 인격이 생겨난다.
크리스틴은 주로, 빌리의 시간을 빼앗아 갓난아기 동생을 예뻐해준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혼날 적에는 "숀"이라는 4살짜리 남자아이가 나타난다.
숀은 귀머거리에다가 집중력이 없는 꼬마아이로, 어른들에게 받은 충격으로부터 빌리를 보호해주는 역활을 한다.
엄마의 세번째 남자, 새아버지 챌머 밀리건이 나타난후, 빌리의 내면에는 점점 많은 인격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의붓아버지로부터 폭행, 고문 및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 빌리의 마음은 24개로 쪼개어지고, 기회만 생기면 자살을 시도하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빌리 자신은 잠들어버린다.

빌리 밀리건의 스물네개의 인격들은 방어기재로써의 저마다의 역활을 책임지고 있다.
이성적인 영국인 아서, 힘쎄고 다혈질이나 정의로운 유고슬라비아인 레이건, 유쾌하고 말솜씨가 뛰어난 앨런, 반항적인 타미, 겁많은 대니, 고통받는 아이 데이비드, 순종적인 아이들 크리스틴과 크리스토퍼 남매, 다정하지만, 늘 사랑을 갈구하는 레즈비언 에이들라나-
열개의 중심인격들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열개의 인격들이 불량자라 지칭하고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열네개의 인격들.
보통 사람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던가, "내가 낯설어지는" 현상같은 것과 다른 점은 기억상실이다.
스물 네개의 인격들은 모두 한사람안에 존재하면서도, 다른 인격이 저지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 인격이 공과금을 내기 위해 돈을 구해놓고, 다른 인격이 그 돈으로 놀러다니고, 다시 다른 인격으로 돌아와 공과금이 없다고 화를 내는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각기 다른 특성과 출신, 억양, 성격을 가진 스물네개의 인격을 한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게다가, 미국을 떠나 살아본적없는 빌리가 영국식 억양으로 말을 한다던가,
유고슬라비아어나, 아랍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점 같은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어떤 인격은 IQ가 63인데비해, 어떤 인격은 IQ가 130이다.
동양에 왔으면 분명 신들린 사람이라 말해졌을 사람, 그가 빌리 밀리건이다.
때로는 정의감이 넘치고, 때로는 오만할 정도로 지적이고, 때로는 바보이며, 때로는 겁많고, 때로는 위협적이다.
빌리는 원한다면 누구라도 될수 있었다.
고통받고 무기력한  "빌리 밀리건" 자신만 아니라면.
 
빌리 밀리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스물네개의 인격 중 하나가 성폭행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문제가 될수 있는 성적인 접촉을 피해자는 인격들 사이의 약속을 어긴 사람은 레즈비언인 에이들라나였다.
빌리 밀리건은 다중인격 정신 장애로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신병원으로 호송되어 치료받기 시작했고, 세상은 빌리 밀리건을 주시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다중인격 성폭행범"이라 비웃고, 어떤 사람들은 범죄자의 교활한 수법이라 탓했지만, 빌리를 치료한 의사나 그의 주위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예술가적인 기질을 타고 났던 빌리는 주위의 보호를 받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나, 간혹 일으키곤했던 정신적인 문제 탓에 그의 정신적인 문제를 믿고, 그를 좋아했던 사람들과 떨어져 좀더 규제가 심한 리마 주립병원으로 옮겨진다.
환자를 구속하고 멸시하며, 학대하는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치료를 통해 통합되어가던
빌리 밀리건의 스물네개의 인격은 다시 산산히 부숴지기 시작한다.

"가끔 전 생각해요. 정말 난 회복되고 싶은 것일까?
이 모든 고통,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구질구질한 일들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기 뇌 한 쪽 구석 뒤에 자기 자신을 묻고 잊어버려야 할까?" (p512)

 
 
자기자신이 희미한 나머지, 좀더 정체성강한 인격들로 자신을 묻어버리고 보호한 빌리 밀리건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인격이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점을 보면, 그의 해리성정체장애는 당연한 것이고,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는 그의 의붓아버지 챌머 밀리건의 주장이나, 갑자기 나타나 모든 것을 설명하는 통합 인격 "선생"의 등장이 늦었던 점을 보면, 빌리의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 믿음의 문제이다. 어느 쪽의 말을 믿건,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저자 다니엘 키스는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의견들을 책속에 실어넣었다.
다중인격으로 고생하고 있는 빌리는 물론이고, 그의 변덕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했던 그의 가족들, 빌리 밀리건을 정신병자가 아닌, 범죄자로 도장찍고, 끝없이 그의 행적을 쫓으며 고발했던 언론과 정치가들.
그들의 의견들을 통해 우리는 또다시 믿음의 갈래길에 봉착하게 된다.
어느 쪽의 말을 믿을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렸지만, 책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위험해져가는 빌리 밀리건이 안타까운 것은 내가 빌리 밀리건의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을 소설처럼 쓴 책이다.
따라서 소설이라기 보다는 소설처럼 쓰여진 정신분석 보고서를 보고있는 느낌을 준다.
(트루먼 카포티의 "인콜드블러드"같은 소설이라 생각하면 정확할 것이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자신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될수 있었던 이 안타까운 사내의 이야기를 보는 내내 비가 내렸고, 마음속에 씁쓸한 우울함과 깊은 연민이 맴돌았다.
나는 빌리 밀리건을 믿는다.
외로운 그를 믿고, 꽃과 나비를 사랑하는 그를 믿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하는 그를 믿고, 상처받고 고통받는 그를 믿는다.
다분이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라 해도-.


스물 세살, 빌리 밀리건은 성폭행범으로 기소된다.
그의 안에 존재하는 인격이었던 <레이건>은 공과금을 내기 위해
강도짓을 하기로 결정하고, 강도짓을 하는 도중에 위험한 인격인 <필립>으로 바뀌기도 하며, 애정이 필요한 레즈비언 <에이들라나>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성폭행의 주범은 <에이들라나>였다.
그녀는 피해자의 옆에 누워 "사랑받는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라고 부드럽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책을 보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뉴스에서 전해들었더라면, 분명 나 역시 쇼한다고 비웃었을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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