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월드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바쁜 와중에 무척 좋아하는 기리노 나쓰오의 리얼 월드의 출간소식을 듣고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최근 일본 미스테리 소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져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몇안되는 좋아하는 일본 작가의 소설들도 함께 쏟아져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희열에 가까운 기분이 아닐까.
작년 이맘때쯤에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열렬히 읽었었는데, 올봄에도 그렇게 될듯 싶다.
곧 나올 "잔학기" "암보스 문도스" "다크" 그리고 이미 다 읽었지만, "아웃"까지-
두근대면서 기다려도 좋을 너무나 좋아하는 기리노 월드~

몇개의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의 공통점은 4명의 여자가 등장해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설명하는 점인데,
워낙 무시무시한 심리표현으로도 유명한 이 작가의 히로인들은 하나같이 서슬이 시퍼렇고,
방종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솔직하면서도, 겉으로 꾸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없이 이기적이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그게 지나쳐 괴물이 되기도 하는 여자들.
인간적으로 공감은 되나, 동정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가끔은 읽는 독자를 자괴감에 빠뜨린다.
<리얼 월드> 역시 4명의 여자가 등장해 하나씩 돌아가며 자신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그로테스크>나 <아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소녀라는 점이다.
훨씬 더 치기어리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며, 무모하다.
그래서 동정할 가치가 더더욱 생기지 않는다.
희한한 일이지만, 내가 학생이던 시절, 주위의 소녀들을 글로 써냈다면,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의 여자, 특히 소녀라 불뤼우는 어린 여자들의 경우에는 온다리쿠 소설에 등장하는 미소녀 군단들처럼
신비롭고 소녀다우며, 환상에 가득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온다리쿠쪽은 남자의 환상에 가깝지 않나 싶다. 또는 소녀들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부분쯤-)
좀더 위험한 방식으로, 위험한 욕망을 품으며, 겁이 나는 동시에 무모해지는 것이 현실의 소녀가 아닐까.

호리닌나라는 재밌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고3 소녀 도시코는 어느 무더운 여름 학원으로 향하는 길에
옆집에 사는 남자아이를 만나고, 소년은 이례적으로 도시코에게 날씨에 대한 말을 걸어온다.
도시코는 길쭉하고 깡마르고 까만 소년에게 마음속으로 미미즈(지렁이)라는 별명을 붙여본다.
그리고 그날, 자전거와 핸드폰을 도난당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옆집 아주머니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잃어버린 자전거와 자전거에 두었던 핸드폰을 가져간 사람은 "미미즈"라는 별명을 붙여보았던 옆집 소년.
어찌된 일인지, 도시코는 소년과 접전하게 되고, 그녀의 세 친구들 역시 미미즈를 맞딱뜨리게 된다.
그저 치기어린 호기심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죽인 기분은 어떨까"하는....
냉정하고 무서운 생각이지만, 저마다의 다른 감정을 품고 소녀들은 하나씩 미미즈를 만나게 된다.

타인의 욕망을 상상하는 것.
소녀들이 저지른 무모한 사건의 내막은 겨우 그런 것이다.
딱히 정의감이 있어서 살인자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동갑내기 소년이기에 거창하게 "살인자"라고 부르고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겁을 먹지도 않았다.
단지, 살인자의 심리가 궁금해서-
이미 어른이 된 입장에서 생각하기에 너무나 무모하고 위험한 생각이 아닐수 없다.
가장 기리노 나쓰오다운 원초적인 욕망이 주는 섬뜩함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네 소녀들은 살인자를 맞딱뜨리고 좀더 직선적인 "리얼월드"를 맛보기를 바랬을런지 몰라도,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리얼월드"가 아니라, 그저 "환타지"일뿐이다.

네소녀가 각기 저마다 마음속으로 친구들을 향해 "너는 날 몰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이,
자신들은 이 친구들과 함께 다니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고 너희들이 모르는 나만의 세계가 있다며,
자신을 특별한 상황으로 몰고가, 나름대로의 비극적인 특권의식을 체득하고
아무리 친한 너희라도 절대로 내 정체를 모를거라 상상하는 것 역시, 자신만의 착각이었듯이 말이다.
세상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저마다의 가면을 만든다는 소녀들의 생각 역시,
어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이다운 치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가면이라는 인식은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부터 가면이 그대로 자신이 되어버리는 어른이 되어버린 후의 그들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어떻게 떠올릴까.

직접 세상으로 나와본적 없는 소녀들의 리얼월드에의 착각과 비현실적인 욕망들이 부딪히면서 벌어지는 일들-
터프하고 러프하고 비참할정도로 이기적인 여자들의 심리를 조각조각 기워넣어, 하나가 완성되는 이야기.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에서 많이도 등장하는 바이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주제들이 식상하지 않다.
여자로써는 볼 때마다 마음이 찔끔거리는 날카로운 구석이 늘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간의 기리노 나쓰오 소설 부류중에서는 <그로테스크>와 가장 가까운 형식의 책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가볍고, 보고난 후의 찝찝한 뒷맛도 없는 소설이지만,
그래서인지 소설이 임팩트는 부족한 편이고,
특히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할지도 몰랐던 데라우치에 대한 묘사가 흐지부지한 편이 있어서 그 점은 아쉽지만,
뭐라도 좋으니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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