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거늘,
일본의 소설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무엇이 살육에 이르는 병이라 말했을까.
책을 다 읽고난 지금도 살육에 이르는 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광기? 정신병? 또는 상처? 집착? 무엇일까?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이 소설 <살육에 이르는 병>은 독자를 엄청난 혼돈의 도가니로 빠뜨려버린다.
그러니까 살육에 이르는 병은 어쩌면 자아의 혼돈인지도 모르겠다.
 
"번개에 맞은것같은 경악"이라는둥,
'주의! 순서대로읽기를 권합니다. 절대로 결말이나 해석을 먼저 보지마세요."라는 둥,
" '나는 속지 않는다.'라고 자부하는 독자를 위한 마지막 한페이지! 모든것은 단 한줄로 허물어진다."라는 둥,
이 19세미만 구독불가 책을 꽁꽁 싸매고 있던 띠지의 말은
"절대로 속지 않겠어!"라고 다짐하는 독자에게 게임을 걸어오는 듯하다.
살포시 비웃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한줄 한줄 단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 가뿐한 소설을 이보다 더 성의있을수 없게 읽어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속고 말았다!
엄청난 정독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줄로 나를 혼돈에 빠뜨려버리고,
"아! 그럼 처음 그 부분이 복선?"이라며 혼자 중얼대면서 결국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나가면서
과연 이 반전에 대한 단서가 충분한가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단서를 모두 확인한 후에, 한쪽으로만 머리를 굴렸던 나자신이
결국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박수를 치며 웃을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엄청난 혼돈, 그리고 엄청난 카타르시스이다.
 
가모우 마사코는 자기아들이 범죄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가모우 미노루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마사코가 의심을 품기 시작하기 전부터이다.
히구치 다케오가 연쇄강간 살인마를 쫓기 시작한 것은 평소 알고지내던 간호사가
연쇄 살인마에게 살해당하고서부터이다.
어느날 갑자기 아들을 의심하게 된 어머니 마사코,
시시하게 보이던 세상이 살육을 통한 성관계로 인해 더이상 시시해지지 않은 살인마 미노루,
사랑하던 아내가 죽은 후로 삶의 의미도 의욕도 잃어버린 히구치,
소설은 세 사람의 시점을 교차해나가며, 독자를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으로 끌고 들어오지만,
마지막 한페이지까지 독자는 이 이야기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지막 한줄, 그 한줄로 모든 이야기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끔찍하고 잔학한 연쇄살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상도 하기 싫은 진실에 맞닥뜨리고,
혼돈에 빠져들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말이란 역시 끝까지 들어봐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달았고,
사람의 편견이 얼마나 많은 착각을 하게만드는지도 알았다.
그리고 제대로된 추리를 하려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문장들을 하나씩 뜯어서 봐야하는
수고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그런 수고따위 하지 않아도 뭐 어떠랴.
추리소설의 매력은 속아넘어가기 아닌가.
내 세계관까지 다 흔들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충격적인 카타르시스-
반전의 매력은 그런 것 아닌가.
 
사실 한방에 뒤집어진다는 말에 "벚꽃지는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다"를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그와 비슷한 추리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 점 역시 핀트가 엇나갔다.
그 마지막 한줄, 읽고나서 멍하니 약 2분간 그 문장만 뚫어져라 보며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조합해서 생각해보고, 또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이야기를 다시 읽어봤지만,
빈틈없다. 단서는 충분했다. 그냥 나는 속아넘어간것이다.
앗하하하하하하하하하!!!!!!!!
최근 몇년간, 막판 반전으로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추리소설 몇권들이 나오긴 했지만,
단 한줄로 독자를 블랙홀로 떨어뜨려버리는 이 소설만큼 충격적이랴.
"벚꽃지는..."도, "점성술 살인사건"도, 스포일러 밭을 저벅저먹 걸으면서도 결코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었던 이 반전에 비하면 그냥 흥미로운 정도랄까.
("벚꽃지는..."같은 경우에는 더군다나 반칙성이 짙었다.)
 
혼돈의 블랙홀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뒤늦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분에게,
심심한 일상을 날려버릴 뒷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신선한 충격을 받고 싶은 분에게, 무한 강추이다.
그리고 절대로 읽는 도중에 다른 것은 보지 말것. 절대로 뒷부분을 확인하려고 하지 말것.
나는 머릿속이 하예지다 못해 왠지 신나졌다!!!!!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p.s 작품이 무척 잔인하다고 해서 19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를 붙이고 나왔는데,
물론 무척 잔혹한 장면이 중반부쯤 등장하지만, 명성(???)만큼 잔인하지는 않으며
잔인한 부분의 분량도 길지 않으니, 고어하다는 말에 겁을 먹었던 사람들이라면 염두해두는 편이 좋겠다.
텐도 아라타의 <고독의 노랫소리>나 <가족사냥>을 읽을수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도 무난히 읽을수 있을 듯싶다.
딱 그 정도의 고어함인듯 싶다. (오히려 <고독의 노랫소리>쪽이 소름끼치는 면으로는 더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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