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다리 포목점 - 오기가미 나오코 소설집
오기가미 나오코 지음, 민경욱 옮김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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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판 달린 재봉틀 하나 마루에 놓여 있다. 이른 햇살이 창 넓은 동쪽 집 마루 깊숙이 내려앉는다. 햇발 곧게 받은 재봉틀의 돌림바퀴가 투명하게 빛난다. 몸체를 받치는 테이블 위에는 자투리 꽃무늬 천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순서에 맞게 더듬더듬 실을 꿴 엄마는 돌림바퀴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장방형의 페달을 밟는다. 앞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발판 위의 엄마 발.

 

 

  시공간을 넘어 잠시 아련한 기억의 창가로 떠나게 하는 건 순전히『히다리 포목점』때문이다. 히다리 포목점은 엄마의 재봉틀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다다다다, 소리를 내는 재봉틀 발판 곁을 주인공 마리오는 안식처로 생각했다.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타는 느낌으로 혼자만의 황홀한 시간 여행을 한다. 순한 모리오와는 달리 그 시절 나는 격자무늬 엄마의 재봉틀 페달이 창살 같다고 생각했다. 숭고한 노동의 다른 이름인 쉼 없이 돌아가는 그 소리에 동조 없는 연민으로 일관했다. 엄마의 삶이, 한 가계의 일상이 좀 더 환한 꽃무늬로 피어나기를 바랐다.

 

 

  상처 많은 청년 모리오는 엄마가 죽은 뒤 가보 같은 재봉틀을 자신의 아파트로 옮겨온다. 그리곤 엄마처럼 바느질을 한다. 스커트 만들 꽃무늬 천을 찾아 몇 시간이나 헤맨 끝에 검은고양이 ‘사부로’씨의 안내로 히다리 포목점에 이른다. 모리오가 아닌 나는 그런 시간이 오면 엄마의 재봉틀을 소중히 간직하게 될까? 재봉틀의 기본조차 모르는 나는 바느질은커녕 모리오처럼 꽃무늬 천을 찾아 오래된 섬유 거리를 헤매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꽃무늬 천으로 만든 엄마의 다양한 베갯잇을 보면서 재봉틀 페달을 돌리던 엄마 발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모리오가 제 엄마의 꽃무니 스커트를 재현할 때, 나는 가만 엄마의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 히다리 포목점 그 치유의 골목을 꿈속에서나 기웃거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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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식당 77 - 자기야, 이 집 가서 밥 먹어!
김미경.조은주.홍미용 지음 / 은행나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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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 사 돌아가는 것 못지않게 사람들은 먹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오죽하면 ‘먹거리 X파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을까. 식자재를 살피고, 식당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며, 때로는 조리 과정의 충격적인 실상을 고발하기도 하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 먹거리야말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 프로그램 중 ‘착한 식당’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다. 주변 제보를 바탕으로 철저한 검증을 거쳐 타당성이 있을 경우 해당 식당을 착한 식당으로 선정하는 것이다. 암행 취재에 재검증 과정 등, 보기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지만 나름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가끔씩 친구들과 가는 짜장면집이 있다. 여름내 덥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했다가 오늘 드디어 그곳에 들렀다. 그 집에서 차려지는 건 짜장면과 단무지만이 아니다. 티끌 하나 없는 정갈한 분위기, 무뚝뚝한 주인장을 대신하는 잔잔한 음악, 안으로 다져 둔 주인의 정성까지 만나게 된다.

 

 

  손수 채취해서 덖은 수국차가 전식으로 나오고, 짜장면이 끝나갈 즈음이면 자연산 감자튀김과 즉석에서 갈아낸 커피가 후식으로 나온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켰을 뿐인데 황후의 밥상이 따로 없다. 혀에 착착 감기는 맛집이 아니니 바쁘지 않아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의 마음 씀이 천성으로 고운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텃밭에서 가꾼 호박잎과 고추까지 덤으로 싸주는 주인장을 뒤로 하며 착한 식당에 대해 생각한다. 그 짜장면집이야말로 내가 선정한 내 맘대로 착한 식당이다. 식재료와 조리과정에 거짓이 없고, 서비스와 위생 상태가 좋은데다 적정한 가격을 유지한다면 객관적으로 착한 식당의 합격점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은 중요하지 않다.

 

 

  착한 식당의 제 일 조건은 음식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주인이 담백하면 그 음식에 거짓이 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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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9-06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짜장면집 어디예요? ㅎㅎ

2012-09-06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2-09-0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장님께 착한 식당 추천해드릴까요, 했더니 조미료를 아예 안 넣을 수는 없기 때문에 착한 식당 아니라며 무덤덤하게 거절하네요. 하지만 다른 중국집에서 먹는 달달하고 느끼한 짜장면에 질린 분께는 강추. 깔끔하고, 소박하고, 특별한 서비스 받고 싶은 분들께 연락처 드립니다.
 
지붕 낮은 집 마음이 자라는 나무 1
임정진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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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붕 허비어 볼까요?

 

  전화를 자주 하느냐 안 하느냐로 효·불효를 따진다면 나는 불효자에 속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속은 그렇지 않겠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한다고 엄마는 애써 위안하신다. 연세에 비해 건강한 축이기도 하고 자식들 전화에 애면글면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걸로 효도를 대신하는 셈이다.

 

 

  며칠 전 태풍이 왔을 때야 걱정이 되어 전화를 드렸다. 형제 중 가장 늦게 안부를 물어 온다며 듣기 좋은 투정을 부리신다. 별 일 없으셨느냐는 의례적인 인사에 그럴 리가 있었겠냐고 기다린 듯 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다른 형제들에게 몇 번이나 쏟아놓았을 그 황망했던 사건은 이러했다.

성당에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데 초로의 사내가 마당에서 서성이더란다. 뉘신가 했더니 엄마 소맷자락을 붙잡고 지붕으로 올라가더란다. 맙소사!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사내가 보여준 장면은 반쯤 허빈 기와로 만신창이가 된 지붕이더란다. 아침나절부터 몰래 지붕에 올라가 장난감 기와를 만지듯 한 장 한 장 뜯어냈던 모양이었다.

 

 

  이웃집 도움으로 경찰이 달려왔다. 안면부지인 사람이 남의 집 지붕은 왜 뜯었냐니까 태풍에 비샐까 손봐주려 했다는 황당한 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지붕 개량 일을 한 적이 있는,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소행으로 잠정결론이 났단다. 오뉴월 닭이 오죽하여 지붕에 올라갈까, 라며 엄마는 사내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며 연민했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기도 잠깐, 지붕 허빈 사내를 위해 며칠 째 기도하는 중이라 했다.

 

 

  해프닝을 지켜본 이웃과 성당 사람들이 합심해 지붕을 도로 덮어 주시더란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엄마가 송수화기 너머로 하는 말 - 이웃은 자식 보다 가깝고 늙을수록 믿는 데가 있어야 한데이. 자식 말고 의지할 데가 있는 엄마의 삶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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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 - 할인행사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톰 행크스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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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곁의 공

 

 

  피지 모누리키 섬에 가야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기억해내기 좋은 오후다. 완전한 고립을 즐길 맞춤한 시간이다. 아파트 너머 강 물결은 잔잔하고 담장 밖 거리의 차 소리조차 새어들지 않는다. 그 섬에 가서 희고 둥근 공인 윌슨과 하룻밤을 지새우리라.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그 몸에 찍어 사람 얼굴을 그려 넣으리라.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고립감이 찾아오면 맘껏 튕겨 울적함을 달래보리라.

 

 

  피지의 모누리키 섬이 배경인 영화「캐스트 어웨이」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개봉한지 십 년이 넘은 영화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남자는 같이 떨어진 소포꾸러미 중 윌슨 상표가 붙은 배구공을 윌슨이라 이름 짓고 친구 삼는다. 삶에 대한 열망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혼재된 4 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남자는 제 자리로 돌아온다.

 

 

  원시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해서 우리 삶이 온전할 것인가. 영화 제목처럼 산다는 건 저마다 망망대해에 버려져 표류하는 것과 같다. 살아갈 희망이 사라진대도, 어긋난 사랑이 부서진대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삶이다.

 

 

  이제 남자는 새로운 삶의 지표를 설정해야 한다. 황량한 사거리에 한 장의 지도를 든 남자. 저쪽으로 가면 텍사스고 이쪽으로 돌면 캘리포니아지요. 낯선 아가씨의 익숙한 친절을 뒤로 하고 담담히 지도를 접는 남자. 하늘색 티셔츠 안으로 꿈꾸듯 바람이 일고, M자로 벗겨진 남자의 이마 위로 생에 대한 호기심이 얼비친다. 오른쪽으로 입 꼬리를 자주 올리는 남자가 독백을 한다. ‘살 만한 게 인생이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솟을 테고, 그 세파에 무엇이 실려 올지 어떻게 알아?’

 

 

  결말을 알 수 없는 그 여정에도 빠져서는 안 될 게 있다. 윌슨이란 이름의 배구공 하나. 소통과 위안을 주는 그 어떤 소품도 남자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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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 답답한 현실을 바꿀 분명한 해답
미하엘 슈미트-살로몬 지음, 김현정 옮김 / 고즈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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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

 

의미 있는 사진전 하나가 개최된다. 서울 안국동 한 갤러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빛과 그림자’라는 타이틀로 이달 말까지 전시한다는 소식이다. 일간지 정치부 사진 기자 출신의 최재영 사진가의 엄선된 작품을 모았다. 역대 일곱 명의 대통령과 당시 대선에 도전한 후보 등 사십여 점의 모습을 담고 있단다.

 

 

전시회를 알리는 소식 중 유독 눈길이 가는 한 컷의 사진이 있다. 전국체전 개막식 스탠드 매스게임에서 연출된 전두환 부부의 얼굴상이다. 카드섹션이라 불리는 그 작업은 그 시절 흔히 행해진 권력자를 향한 강제된 퍼포먼스였다. 몇 컷의 장면을 얻기 위해 주로 천 명 이상의 고등학생이 동원되었다.

 

 

그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낸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로 다른 학교에서 모인 남녀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내용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매스게임 연습에 매달려야만 했다. 대형에 맞춰 훌라후프를 던졌다, 감았다를 수도 없이 하는 사이 여름이 깊어갔다. 이성을 가까이 접할 수 있고, 수업을 빼먹는다는 기쁨만으로 힘든지도 모르고 뙤약볕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던 사회, 집단의 힘을 과시하던 사회, 권력자 개인을 추앙하게 만들던 사회, 그런 억눌림이 일상화되었어도 절실하게 자각하지 못했던 사회. 이런 일이 불과 삼십 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이 이 사진전이 갖는 일반적인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못지않게 그 사진들을 보면서 자신만이 겪은 아련한 땀 냄새를 되불러내는 일, 이것도 사진전이 베푸는 중요한 감흥이 되어 준다.

 

 

철 지난 매스게임 한 컷 사진을 통해 시대가 주는 보편적 정서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개별자로서의 특별한 심상이 떠오르는 일. 사진이 주는 최대의 매력이다. 고린내 나던 운동화를 말리며 매스게임 연습을 하던 그 때의 검은 눈동자들, 풀풀 날리는 먼지처럼 운동장을 떠도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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