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신춘문예 단상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출판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신인 등용문이 넓지 않았던 한때 그것은 문학청년의 로망이었다. 요즘은 굳이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렸다. 성실한 열정으로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가 먼저 알고 작가가 되도록 도와준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면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춘문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한 분야에 몇 백 명이 응모하는데 달랑 한 명만 뽑는 신춘문예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게임과도 같다. 게다가 완전무결하게 공정한 게임도 아니니 부조리한 면도 있다. 최종심에 안착한 작품들이 모두 좋아도 한 편만 뽑아야 되니 심사자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운 있는 자가 당선이란 왕관을 쓰게 된다. 출판 매체들이 내거는 신인상 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출판사 쪽보다 나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신춘문예에 사람들이 몰린다. 왜일까?
신춘문예 제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새해 첫날, 제 이름 자가 박힌 작품이 버젓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것도 메이저급 신문이라면!) 영광을 얻는다는 거다. 일회성일지라도 쓴 글에 대한 보상 치곤 쏠쏠하다. 두 번째로 문단에서 신예작가로 인정해준다지 않는가. 새해 첫날부터 새로운 작가 탄생을 신문사에서 홍보해주니 그 매혹을 떨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두둑한 상금이다. 짧은 소설 한 편에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고액의 고료를 준다.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잔치는 금세 끝나고, 당선자는 머잖아 잊힐 이름이 되고 만다. 신춘문예 당선 자체는 작가의 길과 별 상관이 없다. 작품이 자기를 말해준다. 꾸준한 작품 생산력 없는 작가에게 신춘문예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단발성 등단 절차가 아니라 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십이월이다. 그 진지함의 제일 순서는 ‘부지런히 쓰기’라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2.목소리의 진실
흔히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내 목소리의 느낌이 같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공기 중에 퍼지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주체가 각각 나와 상대로 다르니 목소리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
비염 목소리를 달고 사는 나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주로 오해를 산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아프냐, 감기 걸렸냐, 자다 일어낫냐’고 상대는 조심스레 확인한다. 아프기는커녕 혼자 빈둥거리며 잘 노닐고 있다 받는 전화일 때 주로 상대는 그런 느낌을 받나 보다. 혼자 있다 보면 말에 노출될 기회가 없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낮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게 된다. 여기다 오래 앓아온 비염으로 코 기능이 망가져 왜곡된 목소리로 상대에게 들리는 것이다. 감기 걸렸냐고 상대방이 되물을 때마다 ‘멀쩡한데 비염 목소리 때문에 그래요.’라고 변명하려니 스스로 한심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 고유 목소리의 진실은 어디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구나! 김중혁의 에세이『모든 게 노래』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짜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목소리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중재 과정과 상대 청각이란 거름망을 거쳐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와 상대방 모두 진실을 말하고 듣지만 그건 온전한 진실로 전달되지 못한다. 진실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공기 중을 통과하는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
3. 사람이 우선이다
하반기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끝나간다. 독서 방법이니 논술의 개념이니 하며 회원들과 열 올려가며 공부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어느새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사람의 훈기로 가득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다사로운 분위기를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서로 감지하게 된다.
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아기 손잡고 오는 것도 모자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분, 남들보다 먼저 와 원탁 대형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분,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챙기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 유머와 생활의 지혜로 주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는 분 등등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들을 우리는 만났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공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세부 목표 중의 하나는 ‘짧은 글로 힐링하기’였다. 각자 추천한 그림동화 한 편씩을 매주 돌아가면서 읽었다. 한정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엔 그림동화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동화를 낭독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감탄사나 탄식의 한숨이 섞여 나오곤 했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낭독하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 올바른 자녀관을 갖는다는 것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말썽을 부려도 내 아이, 기쁨을 선사해도 내 아이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 로 자식은 엄마에게 존재하고, 그런 자식에게 한결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상징적 존재로 엄마 또한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된 아들이 불러주는 자장가 앞에 서면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희망이며 사랑이 곧 삶의 의미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사람 모이는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넬슨 만델라
어제는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이 있었다. 비 내리는 요하네스버그 월드컵경기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 앞에 드리는 찬사와 존경의 물결이었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로하니 이란 대통령 등 내로라하는 각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한 인권지도자의 추모식 앞에서는 니 편 내 편의 경계가 필요치 않았다. 적대와 연대를 아우르는 평화의 기치, 그것은 넬슨 만델라가 추구한 궁극의 목표였다. 인권 전도사였던 그의 죽음 앞에서 겨우 화합과 우의의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니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지.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감되기를 몇 차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삼십 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90년 석방된 그는 인권지도자로 돌아왔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민주 선거를 관철시켰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은 물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의 핵심적 리더가 되었다.
추모식장에서 만델라의 오랜 비서를 지낸 이가 말했단다. “적대적 관계였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는 모습을 만델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의 전언은 곧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서로 손 잡는 것,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만델라를 떠나보내면서 깨친다.
5. 안과 밖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서로 맞추기 어렵지 않은가. 오렌님의 서재에서 이런 독서 메모장을 봤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사람이다.’ 옳다구나 싶다. 서양 속담인데 몽테뉴의 수상록이 원 출전이다. 오렌님이 안내하는 책이라면 무조건 믿고 사고파 장바구니에 담았다. (『주석 달린 월든』을 이야기하면서『수상록』을 언급하셨다. 전자도 물론 장바구니 행이다.)
「후회에 대하여」부분에서 몽테뉴는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일갈했다. 프랑스 어로 말한 몽테뉴의 그 말이 영어 식으로 바뀌어 위의 속담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명쾌한 이 한 마디 말로도 고전은 공감의 온상지요, 서늘함의 확인처라는 걸 알겠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바깥에서는 제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면 조금 달라진다. 그건 긴장감의 차이일 것이다. 평판이 두려워, 체면이 깎일까봐, 좋은 인상을 얻기 위해 등등, 사람들은 집밖을 나서면 최소한의 페르소나(가면의 인격)를 연기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면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의 나는 야무지지 못하고 일을 잘 벌인다. 허탕도 잘 치고 허튼짓도 많이 한다. 주책 부리고 실수하는 것은 내 담당이요, 주워 담고 뒤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 아닌 가족이다. 예를 들면 게르마늄 찜기는 당연히 직화 방식으로 불을 쏘이면 안 된다.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먹다 남은 갈비찜이 든 그 도자기 재질 찜기를 가스렌지 불 위에 곧바로 올리고 말았다.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용기는 퍽, 하고 파열음을 냈다. 도자기 파편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주방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낼 힘마저 놓아버렸다.
이럴 때 눈썰미 강한 몽테뉴의 사색을 빌리면 된다. ‘아내와 하인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허점 없이 사는 자는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사람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인격의 가면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경구인지. 집안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