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지나갔다

 

 

책꽂이에서 시집 두어 권과 그 외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시와 소설을 공부하는 이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게 책을 선물한데 대해서 릴레이로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책 선물을 즐기는 편이다. 책장에 넘쳐 방치되느니 친구들과 나눠서 좋은 게 책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책방에 꽂혀 있다 뿐, 내 책들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지도 않다.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을 찾지 못해 다시 주문하거나 빌릴 때도 있다. 정리정돈을 제대로 못할 바에는 될 수 있으면 집안으로 물건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어찌된 건지 내 깜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책만은 다달이 사들인다. 책꽂이는 한정되어 있으니 주변 친구들과 책을 나누면 책방도 깔끔해지고 마음도 달달해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박스 포장을 하기 전 책을 한 번씩 쓰다듬어 본다. 시집 한 권에 손길이 오래 머문다. 얼마 전, 처음 펼치던 순간 헐거웠던 심장이 조여지는 듯한 그 느낌이 다시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갔는지 마당이 어지러웠다 -싸리비로는 어쩌지 못했다, 바닥이 잃어버린 부력을 그늘로 눌러놓은 이곳.’ 젊은 시인 신용목의『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는 이처럼 사람 사이의 여운이 감지된다. 비망록에 새겨둔 바람 같고 물풀 같던 마음결이, 머리가 아니라 손끝이나 가슴으로 읽힌다.

 

 

사람이 지나간 마음자리는 어지럽기 마련이다. 싸리비는커녕 손부채 한 번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력 잃은 그 자리엔 그늘이 눌러 채운다. ‘걸음이 찍어 놓고 간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있었다 어깨가 아팠다’라고 시인은 마치 독자의 마음 끝을 낚기라도 하듯 끝까지 눈썰미라는 낚싯대를 놓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어깨가 아프긴 하다. 그 감잎 줍기 위해 날개를 너무 꺾기 때문일까.

 

 

내 시집을 받을 순한 이는 마당이 어지럽지도, 부력을 잃지도, 어깨가 아프지도 않기만을. 그저 ‘사람이 지나갔다’에서 시인을 뛰어 넘는 무한 발산의 발랄한 상상력을 채워갔으면.

 

 

 

 

  

2. 아니 에르노식으로 쓰기는 어려워

 

 

수치심을 감추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가령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어요.’라고 누군가 진지하게 말한다면 듣는 이는 왠지 모를 부담감을 안게 된다. 누군가의 수치심은 곧 타인의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의 예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에서 따왔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 앞에서 글은 솔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는 그걸 해낸다. 작가는 경험하지 않은 모든 글은 허구라고 단정 짓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경험의 최고 수위에 부끄러움으로 명명되는 그녀의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2년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김탁환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에르노식 글쓰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정신적 외상이 된 일련의 체험들을 까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당돌하고 진솔한 글쓰기를 통해 인간 본연에 대해 성찰한다.

 

 

알고 보면 글이란 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영덩어리인가. 내 부끄러움, 내 수치, 내 껄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수치심이나 증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들을 객관화시켜 글로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약점을 방어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진실한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충족감만큼이나 수치심을 경험하며 산다. 하지만 충족감은 발설하기 쉽고, 수치심은 감추기에 쉽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경험치가 많아서인지 그미가 쓴『부끄러움』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바로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중고판매를 알아본다. 육천 원이던 책값이 적게는 이만 원에서 많게는 십만 원까지 불어났다. 남의 부끄러움엔 시쳇말로 돌 직구를 날리기 쉽지만 내 부끄러움을 글로 까발리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걸, 귀해진 중고책값이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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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7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2-1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읽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 좋아하는데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저어하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새책을 받는 것 보다 읽던 책을 받는 게 부담도 안 되고 더 좋아요,,ㅎㅎㅎ 그렇다고 팜님께 달라는 얘기는 아니에요,,,ㅎㅎㅎㅎ

그런데 어떤 글은 너무 쉽게 자신의 부끄러움을 까발리는 걸 보면 외면하게 되더군요,,처음엔 동정을 하고 공감을 하다가 자주 되면,,,,아니에르노와 상관없는,,,어떤 분의 글을 읽고 느끼는,,,그런데 그렇게 까발(?)리니까 읽고 싶지 않아도 또 읽게 되는;;;이 관음증 환자의 헛소리였습니다. 사르륵(사라지는 소리)

다크아이즈 2013-02-18 07:11   좋아요 0 | URL
나비님 맞아요. 하지만 전 새책도 좋고, 누군가 읽은 책도 좋고 그래요. 둘 다 서로 생각하고 주고받는 맘만은 같을 것이기에^^*

완전히 스스로를 까발릴 자신은 없지만 꼭 드러내야 할 것마저 피하게 되면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그게 글인 것 같습니다. 뭔 소린지 몰라 저는 스스륵 사라집니다. ㅋ

2013-02-17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8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2-1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를 아직 담아만 두고 있는 상태에요. 읽고싶은 작가가 넘 많군요. 진정한 글쓰기, 늘 고민하는 사람만이 좀더 가까이 갈 수 있겠지요. 팜님저럼요.^^

다크아이즈 2013-02-18 07:17   좋아요 0 | URL
고민은 하는데 몸과 맘 다 딸리는(!)게 문제지요.ㅋ
저도 에르노 것으론 칼 같은 글쓰기 밖에 없어서 이번 기회에 부끄러움 훔쳐 볼랬더니 무려 절판이네요. 전 에르노처럼 <스스로 까는 글>을 쓰지도 못 하지만, 그 형식미, 절제미, 거두절미하는 쓰기 방식은 배우고 싶습니다.^^*
프레님도 밝은 하루, 여긴 빗님 추적거리네요..

꿈꾸는섬 2013-02-17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용목, 김탁환, 아니 에르노를 찜해요.^^

다크아이즈 2013-02-18 07:20   좋아요 0 | URL
이런이런, 꿈꾸는섬님 취향에도 맞아야 할텐데... ㅋ

페크pek0501 2013-02-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국문과 교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글을 쓰려면 자신의 항문까지 보여 줄 각오로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온대요. 감추며 글을 쓰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항문까지 보여 주나? 였지요.
저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영역을 어디까지 보여 줘야 하나, 로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어려운 문제예요.^^

다크아이즈 2013-02-19 08:31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님,맞아요. 항문까지 보이고, 까질대로 까져야(다 드러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했어요. 하지만 제 수치를, 제 아픔을 어디까지 까발릴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에르노가 대단한 거지요. 에르노처럼 될 필요는 없지만 과장된 미화나 지나친 비하만을 극복해도 좋은 글 근처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지금 놀러 갈게요.

Jeanne_Hebuterne 2013-02-1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영역을 확장해 나가시는 팜므 느와르님 :)
서재를 둘러보다가 반가운 이름에 잠시 들어왔답니다.
덧붙이지도 덜어내지 않고 어느새 주체가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이 고화질 화면이 된 듯 속속들이 들어오는 그런 글이 좋았어요. 그런데 그러기가 어디 쉽습니까!

다크아이즈 2013-02-19 08:36   좋아요 0 | URL
에르노야 에뷔테른님 전용이지요. 그 옛날(?!) 님이 에르노를 얘기하던 시절에는 받아들이기 싫었는데, 요즘은 좀더 좋아졌어요. 아마, 늙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 세상과 시간에 타협하고, 쓸쓸함과 적막이 좋아지고, 눈비 흩날리는 풍광에 눈길이 가고... 뭐 그런 아침입니다.^^*

굿바이 2013-02-1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제게도 좀 특별한 작가였습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부끄러움. 종종 어깨까지 붉게 물들였던 단어였어요.

다크아이즈 2013-02-19 08:38   좋아요 0 | URL
앗, 굿바이님. 전 님을 생각하면 격조 높은 색체 그림이 자꾸 떠오르지 뭡니까.
저 짧은 댓글 좀 보시어요. <부끄러움, 종종 어깨까지 붉게 물들였>다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