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파스타라는 음식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생 때 아니 엄밀히 말해 국민학생 때였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외교관 집안이어서도 아니고 집안형편이 대박 나게 잘 살아서도 아닌 단지 미국으로 오래 전에 이민을 가셨던 외삼촌 내외분이 잠깐 한국에 나오셨을 때 외숙모가 만들어 주셨던 스파게티를 처음 맛보았던 기억이다.
지금에서야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면 종류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고 통칭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면 요리는 죄다 스파게티인 줄 알고 있었던 나는 그 신기한 요리의 조리과정을 주방 옆에서 지켜봤었다. 토마토 페이스트와 각종 야채와 육류를 넣고 마치 카레처럼 신나게 볶은 후 면은 따로 삶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요즘에 봤던 방식이 아닌 삶은 면 위에 그냥 토마토소스를 부어 덮밥처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외숙모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무슨 맛이라고 표현하기 힘든 맛이 났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스에 면을 볶지 않고 끼얹어 나왔으니 면 따로, 소스 따로 겉도는 맛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남은 토마토소스를 밥에 얹어 카레라이스처럼 먹었던 것이 더 맛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제는 나이도 많이 들으셔 노쇠하시고 집안문제 때문에 더 이상 연락할 이유가 없는 외숙모표 스파게티는 저승에 가서나 다시 맛 볼 수 있을 것 같다.
2.
파스타의 면 종류가 다양하고 많다는 사실은 압구정동 쪽에 있던 어떤 이탈리아 전문 레스토랑에서였다. 한참 놀 때 이 동네에 오는 이유는 나이트나 부킹이 아닌 불법비디오를 교환하기 위해(야동 아니라 애니-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 이런 비디오를 구비한 가게가 하나 있었음.) 혹은 칠리를 먹기 위해서였다. (돈 없으면 웬디스 칠리, 돈 있으면 칠리스표 칠리) 다른 걸 좀 먹어볼까 라는 생각에 칠리스 밑에 있던 레스토랑(하도 오래 전 일이라 이름을 까먹었다. 리틀 이탈리안 인가 뭔가. 암튼 이탈리아 전문이며 건물 하나가 레스토랑이었다.)은 생각보다 사람이 붐볐고 이름 석 자 올리고 대기실에서 호명을 기다리며 홀의 유리장식장 안에 전시되어 있는 파스타 면의 종류에 대해 본의 아니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기다란 샴페인 잔에 장식한 파스타 면의 종류는 생각보다 많았었다. 굵기, 형태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분류를 해놓고 한글로 명칭을 기재했음에도 따라 읽다 보면 혀가 꼬이는 묘한 단어들의 조합. 스파게티가 파스타 면의 한 종류라는 사실. 면이라고 말하기 주저스러운 형태를 가진 커다란 빨대를 어슷썰기 한 것 같은 모양의 파스타까지 별별 종류의 면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으로 모험을 하지 않는 취향 때문인지 면은 언제나 스파게티만을 고집했던 기억이 난다.
3.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유독 “그랑 블루”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유명한 영화니 내용은 재끼고 영화 속 등장인물 중 엔조의 라이벌인 불X친구 자끄(장 르노)라는 터프남이 제일 무서워하는 존재인 엄마가 등장한다. 아들을 위해 파스타를 만드는 엄마. 그 양이 무지막지 하다. 그런데 흔히 알고 있는 토마토소스나 크림소스가 안 보인다. 그냥 허여멀건 하게 기름기만 찰랑찰랑하게 보인다. 역시 우리엄마 파스타가 최고! 라며 게걸스럽게 동료들과 퍼먹는 장면이 나온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 파스타가 알리오올리오. 혹은 봉골레 스타일이라는 것을. 나도 언젠가는 영화 속 자끄처럼 산처럼 쌓아 놓은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어 보고 싶지만 아직 이루진 못했다.
4.
파스타라는 음식이 밖에서 외식용으로만 즐겨 찾던 시기를 지나 이젠 집에서 먹는 방법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저런 가게를 다녀봤고 내 수준에서 그래도 맛나게 먹었던 집은 세종문화회관 옆구리 골목길에 위치한 집이었다. 이런 것도 이제 과거 지사. 결혼 후 어디 나돌아 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마님과 나는 웬만한 건 집에서 만들어 먹어버리는 행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파스타도 마찬가지. 이게 의외로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더라는. 시중에서 파는 소스 재료 사서 간편하게 팬에다 넣어 부닥부닥 거리며 볶아 내버리면 파스타 완성. 조금 호사스럽게 먹자고 작심하면 오븐용 도기에 파스타 넣고 치즈 얹어 구워버리거나 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고든 램지 왈 “이탈리아 요리의 특징은 재료의 신선함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재빠르게 요리해야 한다.”는 이론만큼은 신선한 재료는 빼먹고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