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만년 만에 도시락을 안 싸오다 보니 바로 옆에 위치한 밥집에서 간만에 밥을 먹게 되었다. 점심때면 장사가 제법 잘되는 집이다. 그렇다고 뛰어난 맛을 뽐내는 밥집은 절대 아니다. 그냥저냥 직장인들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데 큰 문제점이 없다 뿐이다. 이집 밥을 질리지도 않고 한 달 내내 먹어주는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 점심은 어찌되었건 이 집에서 먹게 되었는데, 자리를 잡은 위치가 밥상 3개 놓은 작은 방이었다. 우리 일행이 인원수가 되기에 두개를 차지하고 나머지 밥상엔 우리보다 먼저 온 장년의 남성 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매일 먹는다는 이집의 메뉴 중 중국어로 말하면 '제이싼그'를 주문하자 빨리도 밥이 날아온다.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쌀로 지은 밥에 이런저런 반찬 5~6가지, 콩나물에 두부 넣고 끓인 국 한 그릇, 프라이팬에서 뒹굴 거렸을 기름 잔뜩 묻은 계란하나가 전부다. 이렇게 먹고 나면 내 주머니에서 4500원이 나가준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인가 옆자리 장년의 두 아저씨의 대화가 들려온다. 듣고 싶어 들은 게 아닌 워낙 크게 말씀들을 하시다 보니 듣기 싫어도 듣게 되었다.

'이번에 이건희 회장님 풀려난 거...그거 정말 잘한 거야...!! 그 분이 우리나라 지금 이렇게 만든데 10분지 1은 이뤄내신 분이잖아. 외국 가봐 외국에서 한국 알아주는 것도 다 그 분 때문인 거야. 안 그래.? 나쁜 공산당 놈의 새끼들이 그 분을 그렇게 궁지에 몰리게 하다니. 거 뭐냐. 노무현이 그 자식 때부터 그랬잖아. 삼성과 회장님 죽이려고.......(이상하다 내가 알기론 참여정부 시절 삼성은 승승장구 했는데.....내가 잘못알고 있나..) 암튼 정말 잘 된 거야 안 그래?"

마주앉은 또 다른 장년의 아저씨는 다른 말을 꺼내신다.

'맞아 맞아. 그리고 미군기지 그걸 왜 이전해..미군 없으면 우린 허수아비잖아. 그 땅은 미군꺼 아닌가..그걸 내주겠어. 내가 미군이라면 난 못 내주지, 안내주지..암 그럼..'

또 다시 맞은편 아저씨가 말을 받는다.

'그럼 그럼. 그 땅은 우리 땅이 아니지. 그래야 북한 빨갱이 새끼들이 못 내려오지..그리고 지들이 무슨 수로 전쟁을 해. 거 뭐냐 후진타오 다음...음....다음...누구더라..암튼 있어. 중국 다음에 나설 지도자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전쟁하게 만들겠어..!'

암튼 대한민국 나이 먹은 남자들이라면 모여서 떠드는 이야기가 정치 아니면 나랏일이니 옆에서 듣고 있기 좀 괴롭긴 하다. 그렇다고 내가 혈기왕성한 20대라서 상을 뒤엎고 '이 놈의 수구 꼴통 영감탱이들아! 늬들 땜에 이 모양 이 꼴이다!'를 부르짖기에는 난 그리 다혈질적이지도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정의의 용사도 아니다. 단지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확인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 양반들이 시켜먹은 건 7000원짜리(2인분이니까 14000원) 비싼 동태탕이었고 우리가 시켜먹은 건 이 집에서 제일 싸고 빨리 나온다는 4500원짜리 기본 정식. 먹는 것만 봐도 그 양반들은 소위 있는 분들이고 우린 없는 놈들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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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1-0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만원도 아닌 7천원짜리 먹고 계시는 분들의 '생각의 차이'가 넘 심하니..아직도 절망스럽습니다...ㅎㅎ 저는 가끔 정말 돈 많은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별로 돈도 없는 사람들이 골통짓하는게 더 어이없어요,,,

Mephistopheles 2010-01-10 00:15   좋아요 0 | URL
어이가 없으셔도...생각보다 그런 분들 주변에 정말 많습니다...답답한 현실이죠.

비연 2010-01-0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하철 타는 게 괴롭습니다. 경로우대석..그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이 모르는 분들끼리 만나서도 '이건희 회장의 사면은 백번 잘 한 일'이며 이것은 '이명벅대통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얘기할 때는 귀를 닫아두고 싶다는.

[해이] 2010-01-08 14:26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공감가는 댓글 ㅋㅋ

Mephistopheles 2010-01-10 00:15   좋아요 0 | URL
가끔 주변의 소음을 들어야 할 필요성도 존재하지만 이럴땐 이어폰으로라도 귀를 막고 나만의 세계가 필요해지더군요.

L.SHIN 2010-01-08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대의 차이...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있던 지구의 전형적인 유형.
도대체 나는 왜 인간들이 그런 같은 사이클을 질려하지도 않고 반복하는지 궁금합니다.

Mephistopheles 2010-01-10 00:16   좋아요 0 | URL
그건 엘신님이 지구인이 아니시기에 설명도 불가능하고 이해 역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우히히.

무해한모리군 2010-01-0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야 할텐데 --
아 그럼 나도 애들눈에 저렇게 보이는 사람이 되면 어쩌죠 ㅠ.ㅠ

Mephistopheles 2010-01-10 00:17   좋아요 0 | URL
우리 아이들이 요즘 더 무섭습니다. 지금 대학졸업하는 또래들은 공공연히 386세대를 맹렬히 비난하고 원망하는 걸요. 지금의 취업난 등등 자신들에게 처한 곤경이 386세대 때문이라고요..^^

비로그인 2010-01-08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자>라는 영화에 나오는 중소기업 사장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기사 양반은 어떻게 생각하슈?" "뭘 말이에요?" "아, 김정일이하고 노무현이하고 말이요." "전 그런거 관심 없습니다." "뭐요?" "두 사람 다 택시탈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Mephistopheles 2010-01-10 00:17   좋아요 0 | URL
기사양반들이 어쩌면 정세를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할 때가 있습니다. 거리의 지식은 손님을 통해 죄다 습득하시곤 하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10-01-0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도 젊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도 이건희씨 사면에 찬성하는 사람 많습니다.

Mephistopheles 2010-01-10 00:21   좋아요 0 | URL
그래도 그들은 위선적으로 겉으로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속으론 반동되는 짓은 안하잖아요. 권력도 없고 힘도 없기에 사회에 미칠 영향력 또한 없을테고요.(생각이 모이면 문제가 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