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30분
- 엄청난 눈이다. 평소보다 빨리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더군다나 새해 첫 출근. 세수하고 면도하고 아침밥 챙겨 먹고 밖의 상황을 살펴보고 당. 연. 히. 아이젠을 챙긴다. 언젠가 빙판길에 꽤 높은 고도까지 공중부양하며 사정없이 땅바닥에 패대기침을 당한 이후 이런 날에 아이젠은 필수 아이템이 돼 버렸다.
밖에 나가보니 상황이 심각하다. 눈이 왔다. 라는 표현으로 모자란 눈이 지랄 맞게 왔다. 버스를 타기위해 큰길로 나갔더니 그 넓은 왕복 8차선도로가 주차장이 되어 있다. 10여분 버스를 기다리다 포기하고 지하철역으로 이동한다. 상황은.....인간도 저렇게 모여 있다면 제아무리 군데군데 꽃미녀가 포진되어 있어도 충분히 징그럽게 보인다.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사무실까지 걷자.
8시30분
- 걷고 또 걷는다. 여전히 도로는 주차장이다. 도로가 합류하는 지점에선 매캐한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더불어 헛바퀴 도는 수많은 차들이 보인다. 그 와중에 화물차 운전자와 스쿠터 운전자는 쌍욕을 해대며 삿대질이다. 눈이 오면 연인들이 장난을 치며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따윈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치는 사람들 얼굴엔 짜증으로 가득하다.
난 오늘 아침 슈퍼히어로가 된다. 버스보다 택시보다. 비싸다는 포르쉐보다 난 오늘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더불어 아이젠이라는 특수 아이템으로 일반 사람들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눈길에서 벌벌 기는 사람들을 가볍게 재치며 아이젠 스파이크 자국을 눈밭 위에 찍어주며 맹렬하게 전진한다. 환청까지 들린다. '도와줘요! 메피스토' 다음 대사는 당연히 '도와줄께 영혼을 내놔' 이다.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다크히어로일쎄....
9시10분
-사무실 안착. 대부분 직원들은 출근한 상태. 하지만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유는. 송년회 회식하며 소장님이 가져온 양주 한 병 혼자 마시고 헬렐레 전사하여 집으로 일찌감치 퇴장한 후 사단이 일어난 듯하다. 아마도 술김에 치고 받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성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꼭 술을 입이 아니라 주둥이로 마시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송년회라 소장마마도 있었던 것. 왠지 모를 싸한 분위기에 어떻게든 바꿔보려 새해부터 광대 짓을 한다. 난 왜 맨 날 이런 짓만 하는지 모르겠다.
9시50분
-갑작스런 제안이 하나 나온다. 눈도 오겠다. 당장 급한 일 없겠다. 시무식을 극장에서 하자고 한다. 다행히 사무실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개봉관이 존재한다. 영화를 검색하며 의견을 묻는다. 찐한 애로영화나 화끈한 공포영화를 보자고 주장할까 하다가도 이미지에 데미지 입을까 입을 다문다. 무난한 영화가 선택되어진다. '전우치'. 기다려라 수정아 오빠가 간다!
12시00분
-밥 시간이 되었는데 밥 먹으러 갈 생각을 안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1시50분 영화를 보고 영화 끝나고 퇴근하잔다. (아이고 좋아라.) 조금 늦게 극장부근에서 점심 먹고 바로 극장으로 고고씽 하자는 계획이 잡힌다. 개봉관과 가까운 먹을 만한 식당을 수배해본다.
봉우화로에서 가볍게 고추장차돌박이찌게에 밥 한 공기? 아니면 이런 날에 먹어주면 딱 좋은 매콤하고 뜨끈한 국물을 자랑하는 낙지 한 마리 투신한 수제비? 하지만 새해 첫 출근 찌게는 무슨? 밀가루 음식은 무슨? 하시는 소장마마의 역성을 듣고 극장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장수촌이란 불고기집으로 위치 선정. 불고기에 장터국밥까지 시키고 불고기 국물에 메밀면 삶아 먹고 지지고 볶고 소주 2병까지 마시며 본의 아니게 낮술. 우리 소장마마 신조인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는 올해도 여전한가 보다.
1시20분
-문제다. 길은 미끄럽지. 밥 먹은 집은 극장하고는 반대편이지. 남은 시간동안 과연 이 거리를 주파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시간에 영화를 봐야 일찌감치 퇴근할 수 있다는 결과론에 직원들 투지가 불타오른다. 우리는 눈밭을 달려가는 쓰빠르딴이다~~!! (직원 수가 300명은 아닙니다.)
1시50분
-당. 연. 히. 시간에 맞춰 극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문제 발생. 우리 같은 사람이 극장에 제법 많았던 것. 도착은 여유 있게 했지만 티켓을 끊으며 시간을 잡아먹는다. 제아무리 투지에 불타는 쓰빠르딴이더라도 질서는 지켜야지..암..
영화감상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주 대단하다. 라고 말하기는 주저스럽지만 시간이나 돈이 아깝진 않다. 과거와 현재에 걸친 두 시대를 보여주며 영화는 매끄럽게 진행된다. 군데군데 전우치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사회비판적 대사만큼은 감칠맛이 난다. 먹을 이용한 특수효과 역시 독특하고 멋지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수정이. 누구는 영화에서 어색하다느니. 별로 예쁘지 않게 나왔다느니. 강동원만 보이느니 라는 평가를 한다 해도 수정이가 최고다. (마님은 이 페이퍼, 이 서재의 존재를 모른다. 음하하)
3시50분
-2시간을 넘지 않은 영화 덕분에 이런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다니. 다행히 눈은 그쳤다. 하지만 쌓인 눈은 대책이 안 선다. 퇴근길에 동행한 직원 두 명과 걸어가면 약간의 잡담을 나눴다. 그 중 한명은 송년회때 일어났던 충돌의 장본인.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평소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A가 술도 좀 과하게 들어갔겠다. 그동안 불만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것도 목청껏. 그걸 듣고 소장마마 한소리 하신 듯. 이러며 그 문제의 장본인 실쭉 웃으며 ‘A 이제 사무실 나가겠죠? 허허’ 그런다. 사실 A의 비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A는 이 인물과 함께 한달 동안 외지에서 파견근무를 하며 빠질 대로 빠진 근무태도에 엄청난 불만이 폭발한 거였으니까. 그냥 조용하게 한마디 해준다. ‘그러게..왜 욕먹을 짓을 하고 다녀..?’ 그러자 대꾸한다. ‘난 욕먹을 짓 안했어요!’, 다시 대꾸해준다. ‘A랑 파견나간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나랑 나갔으면....’ 어이...이봐...왜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가....날이 많이 춥나?
4시50분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부지런한지 열심히 쓸고 또 쓸어 집까지의 길이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집 가까이 있는 슈퍼마켓 옆에서 낑낑거리며 차를 끌고 나가려다 가게 옆구리 드르륵 밀어버린 아저씨는 참 짜증이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뒹굴 거리며 요따위 페이퍼를 남기고 있는 중이다. 평소보다 몇 배는 오래 걸어서 그런지 허리가 약간 쑤시기 시작한다. 사실 허리보단 더 아픈 부분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내색하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