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남을 웃기는 것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닌 뒤 늦은 만학으로 대학을 수석 졸업하시고 계속해서 학구열을 불태우는 걸로 감동을 주는 정재환 씨가 생각난다. 그가 옛날에 출연했던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훤칠한 키에 호남 형의 잘생긴 얼굴에 목소리까지 좋은 이 분은 분위기를 잡고 한마디 하신다.

"어느 집에 축구공을 차 넣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갑니다. 가서 도둑질을 하는 거죠. 안 걸리면 다행이고, 걸리면 축구공 찾으러 들어왔다고 하는 겁니다. 완벽하지 않습니까?"

그땐 하나도 안 웃기고 뭔 코미디가 저러지 했지만, 그 후 그의 코미디가 대부분 이런 유의 웃기지 않은 콘셉으로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썰렁하지만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 던져놓고 클로징 음악에 맞춰 뻣뻣하게 춤을 추던 모습도 기억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 사는 것도 정재환 씨가 했던 개그 같다면 살기 참 편할 것 같다. 축구공 차 넣고 걸리면 공 찾으러 들어왔다는 근사한 변명. 통한다며 만사 오케이 안 통한다면 뭐 또 어쩔라고?

2.
전쟁사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들은 제법 많다. 영화의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스케일 크고 제작비 많이 들어가곤 한다. 국내에선 유명배우까지 쓸어 담아 영화 만들어 대박을 낸 경우도 있다. 혹자는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스런 명작영화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지만 글쎄다 난 아직까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보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어제 영화주제로 덜 다뤄진 독일과 구소련의 살벌했던 전선인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저격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Enemy at the gates'를 우연찮게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나 재미를 떠나 그쪽 전선을 다룬 영화가 희박하고 더불어 완성도도 제법 높게 보는 지라 여러 차례 보고 또 보던 영화였는데 어젠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 당시 스탈린그라드를 재현한 세트나 인원, 스펙터클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거나, 라이벌로 등장하는 바실리 자이체프와 독일특급 저격수 코닉과의 대결이나 바실리와 타냐(레이첼 웨이즈란 배우를 꽤 좋아한다.)의 사랑에 주목 했었지만 어제 다시 본 영화에선 단연 정치장교 다닐로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장의 폐허에서 우연히 사격 솜씨가 출중한 바실리를 만난 다닐로프는 후르시초프의 면전에서 출세의 기회를 잡는다.

"여기 군인들은 우리에게 죽거나, 독일군에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용기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군대 신문에 희생과 용맹을 찬미하는 극적인 이야기들을 실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희망과 자부심 싸우려는 열망을 심어줘야 합니다. 본보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따를 수 있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영웅입니다." (이게 웬 쌍팔년도 대한늬우스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여기겠지만 그 당시 확실하고 완벽하게 먹혔나 보다.)

정치장교 다닐로프의 예상은 적중한다.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인 소련군은 만들어진 전쟁영웅 바실리의 활약상에 북받쳐 너나 할 것 없이 저격소대에 지원을 한다. 대부분 전선에 내몰려 개죽음 당하지만.

결국 단지 평범한 군인이고자 했던 바실리와의 반목과 질투에 눈이 멀어 자멸의 길을 걷게 되지만 전시에 일어나는 심리전의 효과만큼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당시 이런 분야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괴벨스를 꼽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전쟁에 참여한 나라치고 괴벨스나 다닐로프같은 업무가 본업인 군인들은 수두룩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그 방법과 수단이 여러 가지로 발달되었고 새련 되어졌어도 선동과 선전이라는 맥락만큼은 전혀 바뀌거나 퇴색하진 않았을 것 같다.

이런 선동과 포장된 선전은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쉽게 현혹되고 노출되기 쉽상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회피하고 피해나가야 하겠는데 다른 방법 있겠는가. 진실 되지 않은 여론몰이로 밖에 치부할 수 없는 고단수의 선동과 선전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선 그것을 간파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현안(賢眼)을 가지는 수밖에..(아님 말고.) 그래서 우린 책을 많이 읽고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시야를 크게 가져야 한다. 지식의 축척을 떠나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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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0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 대전을 치른 나라들이 광고가 발달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네요.

Mephistopheles 2009-12-07 00:23   좋아요 0 | URL
선전과 광고.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급박한 전시에 어느 것이 효율적인지 표면적으로 느끼기에 아마도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12-06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젼쟁에서 정치선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가 1차대전이라고 합니다.전쟁이건 전쟁이 끝나건 사람에게는 달콤한 거짓으로 위안을 삼는 심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Mephistopheles 2009-12-07 00:24   좋아요 0 | URL
더불어 피를 부르는 숙청과 제거가 판을 친다는 것도 크게 다르진 않아 보이더라고요. 공식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이 용인되는 비비린내나는 현장인데 덮어씌우고 근사하게 포장은 필수겠죠..^^

야클 2009-12-0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글쓸 여유가 조금 생기셨나봐요?
그리고... 이글도 혹시 의미심장한 중의적인 페이퍼인가요? 요즘 알라딘 자주 안와서 분위기 파악이 잘 안되어서리...^^

Mephistopheles 2009-12-07 00:25   좋아요 0 | URL
한참 바쁠 때 보다 그나마 많이 여유가 생겼답니다. 그리고 제 페이퍼에 있는 내용들은 글이라기도 좀 뭐한 그냥 주절거림일 뿐이에요. 고로 중의적 내용도 없고 별 뜻이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야클님.^^

바람돌이 2009-12-0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님말고 제목이 확 와 닿는군요. ^^

Mephistopheles 2009-12-07 11:18   좋아요 0 | URL
제 페이퍼는 용두사미랍죠..제목 확 눈에 들어오고 별 내용 없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