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일 오후 2시쯤 갑작스럽게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나의 한 주일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7월 초 궤양 수술을 받으시고 경과도 좋았지만 무슨 부작용인지 그 후 음식물 섭취를 못하시다 기초체력 약화로 인해 병원 재입원을 하시려고 준비하는 도중 쓰러지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던 것.
워낙에 황망하게 돌아가셨기에 처가 쪽 식구들 역시 정신이 없이 우왕좌왕했었다. 의료사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존재하기에 확실한 확인을 위해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고 20일부터 3일장에 돌입했다. 거의 잠도 못자고 사위의 입장으로 장례 준비하고 이러저런 준비를 하는 와중 장모님은 충격을 못 이기시고 첫째 날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흐르며 마지막 날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화장을 한 후 경기도 춘천 인근의 납골당에 안치하는 걸로 3일장의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틀 후 삼우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루는 건 처음인지라 나에게 생경한 경험이었다. 더불어 제사조차도 지내지 않는 집안이었기에 이런 형식에 맞춰 지내는 제사는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처형의 시댁이 이런 제사를 일 년에 수 십 번 질리게 지내는 집안인지라 옆에서 물어가며 진행해나갔다. 삼우제까지 끝난 시점은 24일. 와이프나 나나 체력은 고갈 나고 피곤에 절어 있는 상황에서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2.
무역업으로 크게 사업을 벌이시며 한때 호황기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집안이었지만 IMF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고 급속도로 사업이 축소되셨고 결국엔 그 당시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걸었을 부도라는 멍울을 짊어지셨다. 그 결과로 자식들에겐 남겨 줄 유산이라고는 '상속포기각서' 뿐이셨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니 장례를 지내는 동안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저려왔다. 상대적으로 첫째와 둘째의 혼인때 넉넉한 집안형편에 바리바리 부유하게 챙겨주신 것에 비해 언제나 막내사위 제대로 대접 못해줬다고 미안해 하셨지만, 내 주제에도 맞지 않는 그런 과대한 물질적인 선심을 받았다면 내 자신이 그 무게가 부담스럽고 버거워 했을 것 같은 생각도 종종 들곤 했었다.
3.
장인어른의 부재는 곧 처가 쪽 형제들의 현실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장모님을 누가 모시느냐 의 수순으로 발전하기 시작된 것. 1남 2녀에 막내인 와이프는 그 부담감은 극히 덜하긴 하지만 첫째인 장남과 둘째인 장녀가 워낙 장모님과 트러블이 심했기에 완벽한 대안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 진행되었다. 더불어 변덕이 심하신 장모님의 성품 탓에 이런 저런 잡음이 계속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국 가족회의를 거쳐 둘째네 집에 잠시 기거를 하시기로 결정(결국엔 이틀 후 형님이 모셔갔지만.)하고 정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뒷일은 어떻게 진행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와이프는 형편만 된다면 자기가 모시고 싶다고는 하지만서도 나 역시 장모님의 성품을 감당하기엔 자신이 없다.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뱀꼬리 : 생과 사의 고리는 이번 장인어른 장례식을 거치면서 경험하게 되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후 문상을 오지 못한 사무실 직원 중 하나인 과장은 22일 첫째 아들을 얻어 아버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