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구꾸러기

태어남과 동시에 잠시 정신적인 성숙을 거치면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직계가족 특히 부모에게 듣는 소리가 잔소리라 생각된다. 각 집안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관적 객관적으로 우리 집안 아버지의 잔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 객관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냐 하면 작은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

대학교 방학 때 널널한 시간을 틈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한 친구 녀석이 우리 집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워낙에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비디오(빨간딱지 아님)나 보고 만화책이나 뒤적이는 걸 좋아하는 녀석인지라 그냥저냥 오전 일찍부터 와서 뒹굴 거리면 비디오 보고 만화책 보다가 점심 땐 자장면 시켜 먹고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외출하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참고로 아버지는 학생이 방학이면 같이 방학인 직종에 종사하신다. 물론 그때 90년대 초 이야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심과 동시에 난 슬슬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내 친구 녀석은 이 추운 날 어딜 싸돌아다니냐며 그냥 집에서 뭉개자고 제안을 했지만 난 그냥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었을 뿐. 투덜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기 직전 거실에서 마주친 아버지께 졸지에 300연발 6열 발칸에 버금가는 발사속도를 가진 잔소리 집중포화를 평소와는 다르게 친구 녀석도 덩달아 듣게 돼 버렸다. (참고로 이 녀석은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심심하면 우리 집에서 뒹굴 거리던 녀석인지라 아버지 어머니도 무지무지 잘 안다.) 평소 익숙한 나는 그냥 네..네..로 일관한 후 집을 나섰으나 그날 처음 아버지의 잔소리에 직접타격을 받은 녀석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 나에게 이리 말한다.

"웬만하면 일찍 독립해라..나라면 그럴 것 같다..아울러..너의 정신력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버지의 잔소리. 객관적 주관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는 검증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시간이 흘러 무덤덤한 중년이 돼 버린 난 무심해져버렸고 아버지는 연세가 많이 들어버리셨다. 잔소리가 그립진 않으나, 그때처럼 괄괄하지 않으시다는 건 세월의 탓만으로 돌리기엔 내가 많이 부족한 듯하다.

페이퍼에는 이리 써재껴놓고도 그때의 10분의 1의 화력밖에 안 되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을라치면 아마도 난 여전히 무심한 척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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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읽고나니 어쩐지 쓸쓸해지고 짠해지는 글이에요.
왜 늙어가는 아버지들은 함께 늙어가는 어머니들에 비해 더 안쓰러운 걸까요.
(메피님처럼 네.. 네.. 하면 좋은데 저는 꼭 왜.. 왜.. 해서 더 혼난다는. 이런 미련퉁이 같으니라구. -_-)

Mephistopheles 2008-01-23 22:15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네..네..만 하진 않았습니다. 저 역시 왜..왜..쪽이였다죠..단지 저도 늙어감에 따라 왜가 네로 바뀌었을 뿐이라죠..^^

웽스북스 2008-01-23 23:26   좋아요 0 | URL
왜왜는 착하네요 나는 노노 해서 문제이지요
내가 엄마말은 잘 듣는데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좀 심하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어서 엄마를 여러번 속상하게 했지요 ㅠㅠ

깐따삐야 2008-01-23 23:34   좋아요 0 | URL
노노~ ㅋㅋ
전 따지기 시작하면 더더 불리해져요. 우리 엄만 따지기 대마녀라는. -_-
그냥 빨리 고개 숙이고 자아비판 들어가는 게 신상에 이로워요. ㅠㅠ

웽스북스 2008-01-23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대학생이셨으면 뭐 아직 중년은 ㅎㅎ
음, 장년쯤? ㅎㅎ

Mephistopheles 2008-01-24 01:32   좋아요 0 | URL
에이...웬디양님도 참..조만간 3으로 시작하실텐데..너무 기러지 마요.

웽스북스 2008-01-24 01:50   좋아요 0 | URL
조만간이라뇨 340일쯤 남았다구요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4 02:12   좋아요 0 | URL
금방이죠 뭐...갑자기 30에 진입할때가 생각나기 시작.....울컥.

순오기 2008-01-2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나도 어제 아들녀석한테 갈궈대는데...옆에 있던 큰딸년(?)이 대신 따져대서...엄청 험한 분위기로 갈뻔했다. 막내가 컴하면서 '왠만하면 그만하지? 그러다 진짜 싸우겠다!'그래서 표면상 휴전~ '에구, 막내딸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어?' 속으로 이랬다는 ㅠㅠ

웽스북스 2008-01-24 00:45   좋아요 0 | URL
막내가 최강이네요~ ^_^

Mephistopheles 2008-01-24 01:3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댓글로 판단하건데 순오기님댁의 서열이 확실히 보이는군요..

전호인 2008-01-2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부모님을 업어보았더니 너무 가벼워서 놀랐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주녀석들을 마냥 그리워하고 만나면 업어주려하시는 것을 접하면서 옛날의 꼬장꼬장하셨던 기력이 쇠하고 계시다는 것을 어림짐작하곤 합니다.
아~~!
이제 부모님도 늙으시고 있구나를 느끼지요.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거ㅗㅅ이겠지요?

Mephistopheles 2008-01-24 01:34   좋아요 0 | URL
어쩌겠어요..제아무리 잘나가도 세월 앞에서야 스쳐지나가는 주마등이겠죠

보석 2008-01-2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소리에는 그냥 네네 하고 수긍하는 것이(속으로야 어떻든)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08-01-2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의 잔소리의 화력 >>.. 으음.
분명 잘못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면 더 어렵답니다. 메피스토님


이게다예요 2008-01-2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의 잔소리는 엄마의 잔소리완 또 다르겠죠?
워낙 착실해서 잔소리를 안 듣고 자랐는데 ㅋㅋ 농담이고 서로 좀 무뚝뚝하고 무관심해서 부모에게 잔소리를 별로 안 듣고 자랐는데, 메피님 아버지의 잔소리 화력이 이제 떨어진다니... 조금 씁쓸하네요. 그러게요, 잔소리가 영원하지 않죠...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

Mephistopheles 2008-01-24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 // 전 그랬다간.."대답은 잘한다..엉" 이런 잔소리가 날라온다죠..ㅋㅋㅋ
한사님 // 사실...침묵이..제일 무섭죠...차라리 매를 맞는게 속 편할때가 있어요..^^
이게다에요님 // 제 아버지 역시 무뚝뚝하시긴 하지만 왠지모를 직업의 특징이였을까요..엄청난 잔소리꾼이셨죠..^^ 그나마 많이 줄긴 하셨다지만 아직도 잔소리는 ing 십니다.^^ 오죽하면 미국사는 누나에게도 국제전화로 잔소리를 하시니까요..ㅋㅋ 저 역시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이게다에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