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종종 이런말을 했다. '엄마 팔자 딸이 따라간다고.'
자식이 부모팔자 따라간다고. 이혼한 엄마 아래 이혼하는 딸, 무슨무슨 병으로 일찍 떠난 부모아래
같은 병이 걸리는 자식, 또는 내가 아는, 성이 '홍'씨인 친구는 '홍'씨 여자는 팔자가 세다고
가끔 말을 했다. 그런 말에 늘 반발심이 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런건 그저 사람안에 있는
헛된 믿음에 불과하다고.
자신이 홍씨라서 힘들꺼라고 어른들이 말했다고 하지만, 그런 편견같은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그 친구가 십년을 넘게 남자를 사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을때
자꾸 그말을 생각나게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친구는 스스로 힘들어 보이는 관계안으로
뛰어들었다. 보통 알싸하게 머리쓰는 친구들은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하곤 했다.
다른 많은 친구들이 그런 친구를 말리고 화(?)내고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말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한다는데.. 사랑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정말 사랑한다는데 그런 친구를 말리기가 힘들었다. 그저 나 하나라도 편이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들이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은 아니라고 했던가. 살아본 바탕안에 하는 말들이라고..
그 친구는 그런 여러번의 연애속에서도 잘 안되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그러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말은 자꾸 생각난다.
최진실이 죽었다. 이말을 쓰는 것도 손이 무겁고 쓰고 싶지 않고 믿기지 않고.
사람들 모두, 나도, 아이들이 먼저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최진실의 알려진 어렸을적 자라온 어려운 환경이 떠올랐다.
홀어머니 아래 힘들게 자라온.
최진실씨가 이혼했을때 나는 어른들이 한 그말이 또 생각났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아이들이 먼저 떠올랐고. 그러길 몇시간후. 잠시,
최진실씨는 살았을 당시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을 보고 힘내서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을 것이다. 그 말은 어쩌면 사람들이 하는 당연한 말이면서도
본인에게는 알게모르게 쌓였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죽는 결심도 맘대로 못한다. 그녀는 자유로워 졌을까.
그러면서도 나도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걱정된다. 엄마없이 자라야 할 아이들.
다른 사고나 어쩔 수 없는 병이 아닌 이런 사건으로 엄마를 잃은 아이들.
한창 엄마의 보호가, 엄마의 품이,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
내 여덟살 시절 엄마에게 떨어져 본 기억이 생생하게.. 가슴으로 아려오는.. 겁이 많던
소녀는, 엄마에게 떨어지기 싫다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어른들이 나를 붙잡고 있을때
울부짖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뒤로 가끔 볼수 밖에 없었던 엄마는 그리움. 그 자체였다.
그리움, 관심받지 못하는 외로움. 그리움. 서러움.
엄마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
알게모르게 아니 내안에서 거부하려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지금도 살고 있다.
그런 말들은 그저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부모의 팔자가 물려지는 게 아니라고.
전혀 무관하다고. 잘 살수 있다고. 또 이렇게 강조하면 더 역효과 난다고 나는 이런 생각마저도
자주 안하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잘 살아야 한다 아가들. 이쁜이들. 아빠한테 할머니한테 삼촌한테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외로움은 인간 누구나에게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잘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