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동을 전하는 기자이고 싶다
김은혜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뉴스는 사실만 전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전달자의 의견이 포함되어야 하는 질문에 하루(春)님 추천을 해 주신 책입니다. 추천해 주신 분은 앵커는 뉴스 전달시 자신의 의견이나 논평을 포함하는 게 좋다고 하셨습니다. 저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이 없다.’로 생각합니다. 우습지요. 자신은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남에게 해답을 달라고 하니.


 책을 읽고 감상문을 문학적으로 쓰는 소양은 없고 그저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 저의 재능이니 역시 이 책도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여러 곳에서 목적을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된 것을 보입니다.

 첫 번째 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출입할 때 P형사는 경찰대학 졸업생으로 가장시켜 위조해 주었다.’ 명백한 공문서 위조와 P형사를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글 ‘지존파’ ‘귀를 바짝 대고 들었지만...’ 이것을 도청이라고 하면 과한 것일까.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에서는 울타리를 넘었다. 이는 무단침입입니다. ‘나도 먹자’에서 협박 공갈에 해당하는 내용, ‘기자는 별 걸 다해, 신비의 서류뭉치’에서 남의 책상 함부로 열고 서류를 가져가기. (이것은 무슨 죄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네, 절도?).

 ‘삼풍 무너지다.’에서는 경찰들이 지하입구를 통제하기 위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을 분위기가 산만해진 틈을 타서 들어가는 것이 나옵니다. 경찰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자들의 출입을 막을까요?


 스스로가 ‘불법인지 적법인지 그 한계가 다소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그 분계선이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때로는 불법 쪽으로 슬쩍 발을 들이밀기도 했던 그 시절의 행동들을 돌아볼 때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 어디서 많이 본 문장이 아닌가요. 황우석 박사님이 연구를 위해 난자를 비윤리적으로 채취했을 때, MBC PD 수첩이 황우석 박사님을 취재했을 때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 85년도(?) 학력고사 후 대학입학 지원 마지막 날 S대 접수창구가 방송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마감시간이 되자 현관문이 닫혀졌고 저 멀리서 한 학생이 뛰어 오면서 들어가려고 했으나 현관문이 닫친 것을 알고 잠시 당황하다가 유리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알게 되었는데, 이 학생은 합격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두고 다음 날 학교에서는 여러 의견이 오고 갔는데, 뭐 용감했다. 아니다 잘못했다. 어떻게 일 년을 허비하느냐. 당시 선생님 한 분은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내 인생의 일 년을 허비하더라도 돌아갔을 것이다. 저 유리문을 부수는 것은 공공기물 파손의 엄연한 범죄 행위이다. 어떻게 그 학생이 저렇게 행동했는지, 왜 사회에서 그 정도는 용납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 이 말씀은 저의 인생에 또 하나의 가치관이 되었습니다. (뭐 제가 이 기준에 맞게 산다고 할 수 없지만, 그리고 준법선의 가치관이 무법선보다 낫다고 할 수 없지만.)


 스스로가 감동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에서 무엇이 감동인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지존파에서 살아남은 여성에게 인터뷰를 강행하는 것은 시청자나 국민에게 어떤 감동이나 이익을 주었을까. 여성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부담이 되었다고 고백까지 하였지만, ‘그녀가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그녀의 심정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 보였다.’ 과연 그 피해자가 기자와 헤어진 뒤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느꼈을까. 백보 양보하여 그 여성의 경우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경우도 동일하게 반응할까.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기자와 사진 기자 사이에 짤막한 대화, ‘선수들끼리 왜 그래?’ ‘조직폭력배와 만남’에서는 영안실 인터뷰에 대한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을 붙들고 이리저리 요리저리 인터뷰로 따져 묻는 그 자체가 유가족에게는 고문이다.’ 그리고 ‘허공에 뿌려진 염원’에서 납북인 고상문씨의 아내 조복희씨의 자살.


 ‘의사, 작전에 뛰어들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가 아무리 파렴치범이라고 개인의 비밀을 보장하고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다하는 것으로 삼습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적군을 치료합니다. 만약 특정인이 (이글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판 받아 마땅하여 위와 같은 의사 본분을 저버린 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판례 ‘보호할 필요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와 같은 결론을 갖습니다.


 ‘경찰서 신고식, 조련사 선배, 기자들의 시집살이’ 등에서 보이는 위계질서는 그 상급자가 선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아니 오히려 더 좋은 방향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악의를 갖고 있는 상급자일 경우에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상급자나 조직의 비리를 위계질서로 덮으려는.


 기자의 고뇌와 모순 ‘렌즈 속의 숨은 비극’에 잘 나와 있습니다. 냉정한 역사의식의 전사로서와 휴머니즘이 결여된 영원한 방관자로서의 처절한 가슴앓이. 수단의 기아의 참혹함을 고발하였지만 사진의 주인공 여아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명품의 과소비를 고발하는 뉴스가 더욱 더 명품의 소비를 부채질합니다.


 저는 김은혜 앵커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 제가 MBC 뉴스를 볼 당시에는 트로이카 백지연, 정혜정, 김은주 앵커의 전성시대였습니다. - 이 책을 통해 뛰어난 직관력을 보여 주며(‘지존파’에서 부자를 고르는 방법을 백화점에서 고객명단으로 넘겨짚음. 노태우 전 대통령의 수감 장소를 알아내는 것 등)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날..... 샜다, 맨 얼굴의 힘, 자유라는 이름의 대학 등의 글에서)을 알고 매우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글을 통해 ‘기자’라는 직업을 싫어한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영향력이 커서 큰 도덕성이 필요한 직업을 고른다면 아마 정치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 사건에 있어 비도덕적인 일이 발생하였을 때,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도덕적인 사람보다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많고 비도덕적인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역활의 내포된 의미도 도덕성이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 역활의 측면에서 도덕성을 비교하자면 종교계가 더 도덕적이어야 되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비리에 더 흥분해야 되나 종교계의 비리에 접할 기회는 (저에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기자의 경우는 어떨까. 아마 기자의 역할이 사회의 도덕을 감시하는 역할을 갖기 때문에, 그리고 영향력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그 예를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제가 예민해 하는 것 같습니다. 도덕성만 비교하자면 여느 집단, 예를 들면 법조계, 의료계, 종교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영향력과 역할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른 집단과 같은 정도의 도덕성을 갖고 있더라도 저의 부정적 관점이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 영향력에 관한 설명하기 좋은 단편적인 사례가 이 책에 쓰여 있는 ‘명품소비에 관한 고발’입니다. 기자가 명품의 소비를 고발한 것은 명품을 소비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고발은 소비를 더욱 부축입니다. (대부분의 기자가 이것을 모를 만큼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알고도 발표할 만큼 부도덕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부도덕은 제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관점에서는 고발되지 말거나 가능한 한 선정성(및 현장성)을 거의 없애 무덤덤하게 보도(방송)할 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시청률(구독률)과 관련 있는 잠재적 황색 저널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파급효과를 고려해야 될 것인가는 또 다른 논란이겠지만 과학자가 과학연구만으로 도덕적 면죄를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제가 기자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자들이 감당하기에는 제가 너무나도 높은 도덕성과 지적능력을 기대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은혜 앵커의 개인적 매력을 느끼게 하는 구절에 밑줄긋기입니다. : 지금까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라고 꼽는 여성들을 보면 한결같이 도전적이고 공격적이고 독할 정도로 강하다는 이미지가 주류를 이뤘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남성보다 강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여건이 작용해서 그럴 것이고 또 자신에게 혹독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지 않으면 프로로 살아남을 수 없는 지금의 사회 환경을 역설하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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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의 변화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6-05 11:46 
     제거 어렸을 때 서울우유를 가끔 마셨는데, 그 당시에 포장은 원통형의 유리병으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서주우유에서 carton pak이고 불리는 종이로 만든 포장을 시작했습니다. 임성훈와 최미나씨가 광고 모델이었죠. 우유 종이 포장이 나온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우유의 포장이 종이 포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우유가 종이 포장으로 바뀌었을 때 충격은 종이 포장이 처음 나왔을 때 이상이었습니다.  
 
 
마냐 2006-01-16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존파, 귀 바짝 대고 듣던 기억이 저도 납니다. '도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데, 형사과장 방이라든지...문 잠그고 뭔가 하면...혹시 뭐라도 건질까 싶어서 문틈에 온갖 기자들이 수직으로 나란히 귀를 대는 거죠. 어쨌든 그 시절엔 그랬슴다. 은혜씨와 같은 시절 경찰서를 돌았는데...그때만해도 형사들 책상, 캐비넷 뻥뻥 걷어차며 기 세우기, 조서 슬쩍하기, 쓰레기통 뒤지기...뭐 그런 불법 및 폭력적 행위들을 할 수 있으면 하라는 분위기였죠. 경찰은 늘 기자의 밥이었기 때문임다. 당시만해도, 경찰은 늘 구린데가 많았고...작심하면 얼마든 목을 날려줄 수 있다는 식이었기 때문에..그런 말도 안되는 우위가 가능했던 모양임다.
제가 알기로 요즘엔 그런 식의 '오버'는 거의 사라진 듯 합니다. 취재 방식도 많이 바뀌었구요. 물론 할 수 있다면, '잠입'하는 것, 서류 '입수'하는 건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취재에선...무리수를 두는 것도 피해야 하죠. 기자의 도덕성은 취재대상이 간절히 숨기고자 하는 진실 앞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생각하며 유연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원칙은 지켜야죠. 뭐, 비난을 피할 수 생각은 없슴다. 다만 불법을 즐기는 기자가 어디겠슴까. 사안의 심각성, 진실의 무게 등이 판단을 좌우하겠죠. 최근 황교수 사태의 PD수첩 취재진의 취재 방식도 예전엔 드물지 않았던 것이, 최근엔 거의 없어졌다는...수준이겠네요.

황색 저널리즘 지적 앞에선, 참으로 자유롭기 어렵슴다. 보수적 매체든 진보적 매체든...일단 독자의, 시청자의 시선끄는게 먼저다..싶을 수도 있겠죠. 다만, 숨겨진 진실은 늘 짜릿하고, 그 자체로 선정적인 법입니다. 굳이 '초'를 치지 않아도 말이죠. 더 위험한 건, '곡학아세' 부분인데....그건 국내 언론만의 문제도 아니더군요. 거대한 틀에서,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도 이해할 부분이 있슴다. 암튼, 마립간님...앞으로도 기자를 싫어하시길. 보도의 행간을 읽어주시길. 언론의 목소리를 거르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는 것보단 그게 훨 낫슴다. 그런 눈을 키우는데도 언론이 기여할 부분이 있겠지만 말임다........여튼, 그래도 대한민국이 지난 몇십년간 조금이나마 개선된 부분에 있어서, 어떤 기자들은 분명 자부심을 가질겁니다. 지적하신대로 언론의 권력...경계하면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고민하고 또 고민해야겠죠.

하루(春) 2006-01-1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리뷰를 이렇게 쓰시네요. 새롭습니다. 조목조목 짚어주시는 꼼꼼함에 놀랐어요. 꼬집으신 부분에서 제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는 하나, 리뷰를 썼다면 절대 이렇게 못 썼을 거예요. 그럼에도 제가 김은혜 기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스스로에게 꽤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최소한 뭐가 잘못됐고, 뭐가 잘된 건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