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이벤트 글을 올려했는데, 하도 어의가 없는 일을 겪고 나니, 허탈하여 이 글을 올리는 것을 계속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가을산님이 아무 글도 안 올려주시다가 저의 핵심을 파고드는 댓글을 읽고 나니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이벤트에 글을 올려주신 3분이 계시고 2분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무리는 해야죠.


* 황우석 박사님 사건이 있은 다음날 - (공개적인 글에서 존칭을 빼고 쓴 적이 없었는데, 박사님이라는 존칭을 붙이가...) 사실 어제가 아니고 그제 알아야 했던 것을 저는 어제 아침에 알게 된 고로.


 의사에게 인술을 베풀라고 하지만 의사 집단은 보통 사람의 집단입니다. 정말 좋은 의사도 있고, 나쁜 의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는 보통 의사입니다. 의사 중에는 제약회사로부터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도 허위 부당 의료 보험 청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약 분쟁 때 언론에서는 밥그릇 싸움이라고 비난하지만 밥그릇에 무관심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언론이 의사들의 밥그릇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의사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윤리는 환자의 생명입니다. 혹자는 의약분업 때 언론에 보도된 암환자 등의 치료가 미루어진 것을 반례로 들며 반박하실지 모르겠으나 참의료 진료단을 비롯하여 환자에 대한 진료는 하였고, 진료 수준은 환자들에게 심리적 부담감과 번거로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충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잠시 있던 병원에서의 예로 들면 파업을 하였다고 하여 소아과 외래는 닫았는데, 응급실에 소아과와 똑 같이 책상, 간호사를 배치하고 오는 환자 모두를 진료하였고, 수술 환자도 예정된 스케줄을 변경하였지만 파업이 없는 현재도 수술실을 포함한 시술실, 의사, 환자의 사정에 따라 시술 시기는 변동됩니다. 이야기 딴 곳으로 흘렀네요. 의사의 기본은 환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의사라고 할 수 없지요.


 학자도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이 집단의 특징은 학문적 진실성입니다. 교수님이 약물 실험을 위해 학생이나 레지던트에게 약물을 먹이는 실험을 자발적 지원자라는 명목으로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지금에는 그 때 약물의 부작용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지만 당시 당사자에게는 곤욕이었지요. 이런 비윤리(?!)인 일이 있지만 그 결과(Result)를 보고하는 논문에서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물론 논평(Conclusion)에서는 왜곡이 많습니다. 따라서 전문가는 논문에서 서론(Introduction, Background/Aims), 과정(Methods), 결과, 논평을 모두 세심하게 검토합니다. 그러므로 결과(Result)를 허위로 기재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것은 의사의 기본이 환자인 것과 같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환자가 죽었을 때 의사가 ‘그래 잘 죽었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학자의 기본은 진리에 접근하는 것에 있어서의 정직입니다. 잘못된 논문은 매우 많습니다. 기생충을 암의 원인이라도 생각하여 노벨상이 주어진 적도 있고, 70년에는 김칫국물인가, 식초인가가 연탄가스(일산화 탄소) 중독의 치료로 발표된 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의 오류이지 부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PD 수첩에게 황색 저널리즘으로 비난했던 것을 사과했듯이 황우석 박사님에게 다시 사과할 일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정황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네요.


* 이미 제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주제이고, MBC 뉴스 앵커 최일구씨의 진행에서 논란되었던 주제입니다.


논제 10) 뉴스는 사실만 전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전달자의 의견/논평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허용이 된다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 전문가

 직업란 항목에 전문가도 있고 변호사와 같은 직업이 그 예로 들지만 전문가 집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란 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비전문가와 다르게 깊고 폭 넓습니다. 그래서 부여되는 것이 자율성과 결정권입니다. 그러나 그 분야에 파생된 부분에 관해서 비전문가는 자율성의 유보를 전문가는 자율성의 유지를 주장합니다. 글이 어려워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수학과 교수님과 국문학과 교수님, 국사학과 교수님 세분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연히 수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국문학과나 국사학과 교수님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수학과 교수님은 수학의 전문가이시니까요. 국문학 이야기나 국사학 이야기 때도 마찬가지로 각각 교수님이 이야기할 때 다른 교수님은 전문성을 인정하셨지요.

 그런데 이야기가 강의 방법으로 옮겨갔습니다. 국문학 교수님이나 국사학 강의는 학생들이 재미있어 하는데, 수학과 교수님의 강의는 학생들이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수학과 교수님은 항변을 하십니다. ‘어떻게 국문학이나 역사 강의와 수학의 강의를 비교할 수 있는가? 수학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논제 11) 전문가의 자율성은 어디까지 인정되는가? 예를 들면 수학자의 수학 강의 방법은 수학자 이외에 간섭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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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의 변화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6-05 11:46 
     제거 어렸을 때 서울우유를 가끔 마셨는데, 그 당시에 포장은 원통형의 유리병으로 포장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서주우유에서 carton pak이고 불리는 종이로 만든 포장을 시작했습니다. 임성훈와 최미나씨가 광고 모델이었죠. 우유 종이 포장이 나온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우유의 포장이 종이 포장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우유가 종이 포장으로 바뀌었을 때 충격은 종이 포장이 처음 나왔을 때 이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