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1006

 

<원림>

- 문화적 도교 ; 자연과 가까운 삶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1, 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의 추정이다. 최소한 식민지 제국주의 이전은 아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1960년대 이후가 될 것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자연( 자원)의 우위에서 인공 人工의 우위로 변화되었다.

 

내가 자연보호를 지지하는 이유는 생태순환이 관점이 장기적 안목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자연에 대한 심미적 것 때문이다. 두 번째 관점에서 읽은 책이 <원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중국의 스케일을 느낄 수 있지만, 꼭 원림을 통해서만 자연 친화가 연상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적 자연 친화 환경에 관심이 많다. 내가 구입한 <한국의 옛 조경>, <한옥의 조형>, <집꾸미기>, <소쇄원> 등은 <원림>을 구입한 동기와 같다.

 

문제는 이런 자연 친화적인 (주거) 환경이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 본 곳 아침고요수목원’, ‘화담숲과 같은) 수목원이나 자연이 잘 반영된 태권도원같은 곳, 자연이 잘 녹아 있거나 자연과 잘 어울린다는 감상평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냥 거저 형성된 것이 아니다. 나의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중동의 사막에도 녹색 지대를 만들 수 있다. 단지 비용(에너지, 석유, 또는 돈)이 필요할 뿐이다. 자연 환경을 즐기기 위해서는 비용이 지불해야 하고, (경제적) 지불 능력은 (인간 사회 전체로 볼 때)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딜레마를 보여준다.

 

원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언급하고 지나간다.) 진나라의 아방궁을 떠올리면 사회적 비용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실례를 찾아보자. 전원주택이라는 곳에 부유한 사람이 거주하는가, 보통 또는 보통 이하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주하는가.

 

<녹색당 선언> p198 후배가 인천에 놀러온 적이 있었다. 후배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월미산 근처로 가서 인천 앞바다를 보여주었다. 바다를 본 후배는 외쳤다. “이건 내가 생각한 바다가 아니야!” 후배는 아마도 하얀 백사장과 파란 바다를 상상한 것 같다. “미안해, 인천 앞바다는 똥물이야 ...” (중략) 나는 바닷물에서 멱 감고 놀려면 송도유원지로 가거나, 차를 타고 도시와 멀리 떨어진 동해안으로 가거나, 배 타고 섬에 들어갔다. 공통점은 하나, 모두 입장료를 받았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산 사람들 떠올릴 때, 죽림칠현 竹林七賢, 상산사호 常山四皓, 강좌칠현 江左七賢를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노동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녹색당 선언> p224 뭐라고 표현하더라도, 여행이라는 것은 대단히 특권적인 일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나는 누군가 자연과 가까운 삶을 누리고 있다면 그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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