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 문명과 문명의 대화,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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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개인적인 경험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자연과학은 비교적 절대적이고 인문과학은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학의 여러 가지 정리나 과학에서 뉴턴 운동 법칙은 어느 나라에서 같지만 인문에 관한 것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도는?’라는 질문에 한국인인 저는 서울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꼭 같은 질문을 미국사람이 받았다면 워싱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은?’이라는 질문에는 저는 이승만이라고 말하겠지만 영국 사람에게는 잘못된 질문이 되겠지요.


 말다툼이 있던 두 친구에서 중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말의 뉘앙스nuance는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있는 사실을 다르게 혹은 틀리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는데 어떤 이는 물이 반밖에 없다고 하고 다른 이는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합니다.


 철창을 마주 선 사람과 원숭이가 있는 사진을 보고 원숭이와 사람 중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이라는 질문에 대부분은 상식에 기초하여 원숭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혹시 사람이 원숭이 우리를 청소하기 위해 안에 들어가고 그 사이에 잠깐 원숭이가 밖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제가 알고 있는 분이 상식 또는 전통에 관한 말씀하시기를 그것이 형성되기 까지 필요했고 그 당시 사람에게는 편안함을 준다고 합니다. 진실과는 같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상식에 의존함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설명 중 가장 매력을 끈 것은 p22에 있는 마젤란 기념비와 라프라프 기념비의 언급입니다. 저자들이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에서 가르쳐 온 세계사는 유럽, 기독교, 민주주의가 중심이었습니다. 아마도 서양 세계사를 무비판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학생시절에 국사에서는 최초의 금속 활자본은 상정고금예문이고, 남아있는 활자본은 직지심경이라고 하면서도 세계사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였다고 합니다. 어색한 감성을 느꼈지만 세계사에서 금속활자에 관한 것을 어떻게 기술하는 것이 공정하고 옳은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남이 인정해 주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이 지적하는 유럽 중심주의를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 사람은 이슬람교나 힌두교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세계적인 종교임에도 세계사에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요즘은 중동 분쟁, 전쟁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왜 유럽 중심주의 세계사가 되었는가? 우리나라에서만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제가 좋아하는 위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을 쓴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겼음에도 당시에는 너무 선진적인 발견, 발명에 후계자와 제자를 길러내지 못해 과학사에 영향을 남기 못했기 때문에 과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영어는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외국어에 불과합니다. 역사가 지역별로 공평하게 써야 한다면 그리고 그 원리를 외국어에도 적용하면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외국어 교육은 160여 개국의 외국어를 같은 학생 수가 배울 수 있게 나누어야 되나요? 여담을 하자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EBS 외국어 방송은 영어가 독점적인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일어, 그리고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에스파냐어, 중국어가 동등한 위치를 갖고 있었는데, 요즘은 중국어가 영어 다음 가는 방송의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몇 가지 훌륭한 점과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우선 머리말에 언급하였듯이 서구 중심의 서술을 벗어나기 위해, 유럽사, 동아시아사, 동남아시아와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의 배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럽, 미국 중심에서 세계의 다원주의를 반영하는 것인데 저자들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일 수도 있지만 현재 세계 흐름이 세계 다원주의로 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선후 관계야 어째든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책에 많은 지도와 화보를 곁들여 이해를 쉽게 한 점입니다. 세계사를 배울 때 시험을 위해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면서도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지 모르고 암기한 적도 있습니다. 사회과부도를 일일이 찾아 볼 정도로 성의가 있지도 않았고 번거롭기도 하였습니다.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면 우선 내용이 얕습니다. 중학교 학생의 세계사 개론서라면 모를까 고등학생이 읽기에도 너무 쉽고 간략한 내용만 있습니다. 그 방대한 세계사를 지도와 화보를 곁들여 3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 두 권에 담았다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교사가 주축이 된 ‘청소년과 함께 살아 숨쉬는 21세기 대한 교과서’이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래도 교과서라고 이름 부치기에도 조금은 내용이 부실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보다도 더 아쉬운 점은 “한국인의 눈으로 세계사를 읽는다.”라고 할 만큼 신선한 시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도 지면의 배분과 지도를 삽인 한 것을 세계사를 보는 눈으로 이야기 한다면 모를까? 여성의 역사라고 한 페이지씩 들어가 있는 것도 조금은... 마음에 안 듭니다. 왜 여성은 인류의 역사 - 세계사 -에 포함되지 못하고 여성의 역사로 독립했을까? 과거가 남성의 여자에 대한 지배 역사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과거의 세계사가 유럽 백인들의 세계 정복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각 지역이 발전과 더불어 각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마당에, 또한 양성 평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때에 구색을 맞추는 듯한, 여성의 역사는 오히려 속 좁은 듯합니다. 태평천국 난에서 여성은 당시에는 혁신적인 경제적 부담(논밭에서 일하는 것)과 병역까지 남녀 동등한 기계적 평등이었습니다. 과연 기계적 평등이 평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시 여성들이 기계적 평등을 꿈꿔왔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치판단이 쉽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문명이라는 폭력’라는 말과 근대에 있었던 세계사적 사건들, 현대의 역사적 이해는 어렵습니다. 기존의 한쪽으로 치운 친 가치관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들이 미치는 다양한 효과를 기술하기에는 지면이 좁았네요. 그리고 책 띠에 쓰인 글 ‘정해진 삶은 없다, 틀에 박힌 교과서도 없다.’ - 그렇다면 왜곡된 일본 역사 교과서도 옳은 것일까요? 비록 상대주의적 역사관이 있으나 옳은 것에 대한 기준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현대사에 대해서는 빠져있는 의견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희망하는 평화로운 세상’ - 세계사가 주는 교훈은 인간이라는 종족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라 말이 있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인, 전쟁광만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전쟁광이 없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왜 전쟁광이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을까. 얼마 전 인터넷에 ‘정직한 자는 가난하게 산다.’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살 것인가? 우리나라는 정직하게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할까? 우리나라는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옛 이름 보르네오)에서 나무를 베어 합판을 만들며 국부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몇 가지를 반성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몇 선대 분들이 선진국에서 인종적 차별을 당한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나라에 온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차별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많은 문화와 인종을 이해하고자 하나 국내의 이념, 지역, 세대 갈등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쉬움이 있지만 좋은 책입니다. 그리고 이 서평은 알라딘에서 마련한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어 쓰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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