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0302
<남명 조식 칼을 찬 유학자>
- 남명의 우려와 경계 ; 철학은 도학道學의 타락이다
p47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 천리를 담론하여
누군가 ‘바둑을 책을 통해서 배우고 잘 두게 된 다음에 바둑을 둘 생각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당신 생각은 틀렸소’라고 말할 것이다. 책을 읽고 공부도 해야지만, 바둑을 두어야만 바둑이 는다.
p47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남명의 사고를 교육관에 적용하면 ‘토론식 수업’은 악惡이다. 초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 교육까지 선생님의 올바른 가치관과 지식을 주입하고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때 쯤, 자유로운 사고 및 토론이 가능하다. 현대에는 부모, 특히 아버지들의 보수적 관점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편적으로, 강력하게 적용되고 있다.
플라톤-노자주의자들은 낯설음을 싫어한다. 특히 싫어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낯설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플라톤-노자주의자들의 바람처럼 목적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장자주의적인) 적응과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굴절적응이 존재한다. 플라톤-노자주의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벽하게 관철하기 위해서는 적응과 굴절적응이 예측 가능한 범위에 들어야 와야 하는데, 과학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측 불가능한 결과가 미덕이 될지 악덕-타락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남명의 우려와 경계는 맞지만, 우려와 경계를 관철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cf p66 선생이 이르시기를, 학學은 반드시 자득自得을 귀히 여긴다. ;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동기 유발을 시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