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記錄 150126
* 직관에 관하여
이전에 ‘대장금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직관에 관해 글을 썼다.
* 대장금의 이야기 http://blog.aladin.co.kr/maripkahn/11644
윗글에도 있지만 나는 직관에 대해 complex가 있었다. 그리고 부정적 감정이 덧씌워졌다. A라는 장소를 찾아가려 한다. 나는 A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교통수단으로 a를 이정표 삼아 이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반명 장금이는 A로 가기 위해 c로 이동하자고 한다. 왜냐고 내가 되물으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c로 이동하던 중 그만 이동 수단을 바꾸자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이쯤에서 그래야 될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설명이 따르지 않는 장금의 결정을 올바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처음에 장금의 사고-판단을 운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운으로 판단하기에 정확도가 너무 높았다. 그 다음의 직관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해와 근거에 의한 사고의 결과이지만 사고의 과정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직관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이 연관을 가지게 된 것은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이다. 논리와 추론이 명시적 지식과 연관이 있다면 직관은 암묵적 지식과 연관을 갖는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직관(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내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수학 <원론 Elements>의 4개의 공리, 1개의 공준, 5개의 상식 때문이다.
‘같은 것에 같은 것은 서로 같다.’
사람들은 위의 공리를 자명하게 맞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위의 공리가 맞다는 것을 어찌 아는가? 윗글은 누구에게 진실임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설명하려 할수록 오류가 발생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직관이(라고 주장한)다.
동물의 경우도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대개의 3까지 숫자는 셀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동물에게 3에서 4로 개념의 확장하는 추상적, 추론적 사고가 불가능함에도 3까지는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한 설명으로 촘스키 Chomsky, Noam의 ‘언어를 획득하는 자질은 인간에게 생득적으로 구비되어 있고’라는 가설을 빌려올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선행 요인과 촉발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인간이 언어, 수학적 사고를 하는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선험적 사고 체계와 경험의 촉발이 실체를 만든다.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이냐는 과학적 관점에서 의미 없는 논쟁이다. (사회적 관점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순수 이성 비판>의 순수는 경험 이전, 즉 선험先驗을 말한다 (또는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칸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는 이성을 지나치게 이상理想화하여 이성의 실체( 또는 분질)를 불분명하게 만든 것이다. 학창 시절에 배운 것으로는 칸트는 이성과 오성悟性을 구분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이성과 지성知性을 구분하였다. 정확하게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과학적 기준 scientific definition, criteria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
나는 ‘순수 이성’이라는 낯선 말보다는 ‘직관’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직관은 세상을 이해하는 세 가지 원류原流 수학-정신-물리를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나는 네 가지 원류의 가능성도 고려하는데, 이때는 생명이 추가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직관을 분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사고-판단의 기제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의한 직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더 이상 분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을 받아들일 때 사용한다. 그 예는 원론의 공리와 같은 경우이다. 그리고 이 경우가 순수 이성이다. 두 번째는 대상을 분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그 본질을 훼손하는 경우다. 그 예로 장금의 홍시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 경우가 도덕경의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