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701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 많은 예화가 있지만 나의 개인적 경험을 섞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어느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편지로 사연을 소개하는 방송이었는데, 흉악 범죄가 있었고 방송에 범죄에 대한 방송이 많이 나온 직후에 소개된 사연이었다.
사연은 ; 어느 낯선 사람이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주부는 그 객客이 불쌍하여 먹을 것을 차리고 그는 그 동안 잠이 들었다. 객은 어느 정도 잠을 잔 후 식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내용을 요약했지만, 당시 사회자는 글을 읽는 동안 눈물을 훌쩍이기도 했고, 다 읽고 난 후 탄식이 이어졌다. ‘어찌하다가 사회가 이리 각박해졌을까!’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가 훨씬 인간적인, 다정다감했던 시대다. 이후 내가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러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어른이 없다는 (혹은 남자가 없다는 이유로) 문적박대를 당했다. 완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다시 오라고. (당시에는 어이없었지만, 지금은 보편화가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방송에서 흉악 범죄를 줄이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연구에 따르면 열린 마음과 열린 행동이 흉악 범죄를 줄인다는 것이다. 즉 낯선 사람을 집안으로 들일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흉악 범죄를 줄인다는 것이다. 사회자가 되물었다. 그렇게 열린 행동을 하다가 (마치 <방황하는 칼날>의 범인과 같은) 흉악범의 피해자가 되면 어떡해요?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얼버무리면서 대화는 끝을 낸다.
나는 진보의 내재적 모순을 느낄 때가 많은데, (‘관용은 불관용까지 관용해야 하는 것인가’처럼,) ‘내집단의 단결은 외집단에 배척’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는 내부적 형제애와 외부적 호전성을 비교하는데, 호전성이라는 과도한 상황과 비교한 잘못된 연구라고 생각한다. 즉 옆에 굶어 죽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동감이 강해 도와줄 정도의 진보적인 마음가짐은 먼 곳에 사는 외모가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 동감과 상충하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p295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희생, 외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 내부적 형제애, 외부적 호전성은 동일한 상황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의 많은 생각은 전적으로 틀렸다. ; 나는 틀렸다는 생각에 동감할 수 없다.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희생, 외부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 내부적 형제애, 외부적 호전성은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생각한다.
<바른 마음> p46 사냥 파티 ; 여기서는 내부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이웃 부족의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을 죽인다.
* ‘우리’라는 심리를 가장 강조는 집단을 고르라면, 군軍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동료의 도움이 전제적인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우리’라는 내집단의 강조의 역효과는 ‘우리’에 들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들’이라는 ‘낙인’을 남기고 내집단의 결속력만큼 낙인 받은 자들을 가혹하게 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군의 관심병사는 군 조직의 생태적, 구조적 문제로 귀결된다. 특히 육체적 가혹 행위나 언어 가혹 행위보다 부류의 배제는 당사자에게 더 가혹할 수 있다. 특히 폐쇄된 집단이라면 그렇다.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하는가> p87 이것은 아니러니하다. 특별한 창조에 대한 믿음은 신자들이 생물학적 적응도가 더 높은 삶을 살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의식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특별한 비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우리’라는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이 생존을 높인다면 우리 인류는 영원히 착각하게 되는 과정을 밟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