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527
<강신주의 감정수업>
이번 글은 감정에 대한 각론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대한 반론이기보다 스파노자의 <에티카>에 대한 반론일 수 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 인용된 스피노자의 감정의 정의에 대해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과 동감하지 못하는 부분을 비망록으로 남긴다. 아마 <에티카>를 읽게 되면 전후 맥락을 파악하면서 내가 이해 못한 부분이 이해되거나 오해가 풀릴 수도 있겠다.
1) 욕망 ; 인간이 생물로서 진화론적으로 생존을 위한 어떤 것이라면 기본적인 감정으로 인정할 수 있고 단자monad적 감정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인간의 본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2) 공포 ; 욕망이 본질적 감정이라면, 이 욕망 즉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공포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단자monad적 감정으로 생각된다.)
p183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있다. ... 그래서 순간의 안위를 확보하려다가 자신의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p110 가난 때문인지, 아니면 피해의식 때문인지, 메리의 아버지는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나약하고 소시민적인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해석할 경우, 개인의 이기주의, 재벌이라는 경제 집단의 이기주의, 강대국의 이기주의 등을 비판할 도덕적 근거를 약화시킨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본질과 도덕과는 무관하다. 같게 생각한다면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기쁨과 슬픔에 대한 것은 앞글에서 이야기했지만, 기쁨과 슬픔이 본질적 감정이라기보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대표한 제유법提喩法으로 생각할 수 있다.
p483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스피노자의 말대로 슬픔은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하다는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다.
3) 슬픔 ; 스피노자와 강신주의 이야기가 비슷하지만 틀리다. 슬픔을 스피노자는 완전성 차제의 변화로, 강신주는 그런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p284 무레의 겸손은 자신이 자랑하던 돈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4) 겸손 ; 겸손이 감정인지 확실하게 판단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의 법주로서 습관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생활에 유용한 습관. 겸손이 무력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겸손은 혼자 이뤄질 수 없다. 그런 습관의 기제에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각共感覺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겸손할 때 스스로 겸손함을 느끼는가?
p260 영광 우리가 ...
5) 영광 ; 영광이라는 감정은 겸손과 같이 사회/집단에서만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의 설명에는 우리라는 주어로 설명이 시작된다. 보수주의적 성향의 사람은 이 감정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명예’나 ‘영예’라는 이름으로 높은 도덕으로 판단했다. 보다 보편적인 (그러니까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시각에서 도덕적 평가가 궁금하다.
p66 기쁨을 주던 사람과 헤어지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우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 헤어져 있을 때, 우리의 슬픔이 어떤 강도로 발생하는지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구분된다. 슬픔이 너무 크다면, 아무리 우정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사랑이다. 반면 생각보다 작다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의 관계라 해도 그것은 우정에 불과한 것이다.
p273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제대로 관철된다면, 친절의 행위는 사실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6) 우정 ; 나는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정도 차이로 보지 않는다. 우정은 사랑에 없는 상호 존경을 바탕으로 한 의지가 존재한다. 이것의 유무가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부부사이에도 사랑보다는 우정과 같은 사랑이 더 높은 가치가 있다. 친구 같은 부부는 부녀父女나 모자母子 같은 부부보다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불경에는 어머니 같은, 누나 같은, 친구 같은, 며느리 같은, 종 같은, 원수 같은, 도둑 같은 아내가 있다.) 사랑에서는 친절이 필요 없지만, 우정에서는 친절이 필요하다.
p443 희망은 그것이 안겨 주는 기쁨이라는 앞면과 불확실성이라는 뒷면을 가진 동전과도 같다./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p448 희망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 설레는 미래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7) 희망 ; 희망의 가치가 설레는 것에 있다면, 왜 설레는 미래가 왜 중요한가?
p432 확신은 의심이 제거된
8) 확신 ; 확신의 정의는 ‘의심이 제거된’라는 말에서 동어반복임을 알 수 있다. 믿음/확신은 감정의 하나임이 맞지만, 야심이 욕망을 증진시키는 것같이, 기쁨, 슬픔의 변주가 아닌 독립된 감정으로 따로 분류되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차원에서 확신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불신은 믿음/확신의 한 종류로 판단된다. ‘나는 내일 죽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 기쁨/슬픔을 느끼는가?
경멸, 잔인함 등에 대한 설명은 잘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 9) 잔인함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가? 상대만 파괴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p491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시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p492 치욕은 슬픈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그런 슬픔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려는 원동력이니가. 그러니까 수치심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치욕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치욕과 수치심은 정의하기 나름이지만 사람들이 이 책에서 말한 10) 수치심을 갖고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