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讀書日記 140501
<이방인> 서평 별점 ; ★★★ (별점은 역자노트 빼고)
이 책은 번역 논쟁과 관련하여 읽게 되었다. 소설을 안 읽는 내가 번역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소설을 다른 두 책으로 읽은 것은 내가 봐도 놀랍고 이례적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이 글은 책 <이방인>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고, 김화영의 <이방인>과 대비되는 이정서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상대 평가인 이 두 책에서 이정서의 <이방인>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한다. 나는 많은 사람이 장점으로 여겼던 가독성을 원작의 충실성보다 낮게 평가한다. 게다가 김화영의 <이방인>도 난해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묘사를 포함한 세세한 것에 잘 감동하지 못한다. 오탈자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대민한국’이라고 쓰여 있어도 ‘대한민국’이라고 인식한다. 내가 주로 감동하는 것은 주제와 주제를 뒷받침하는 구성이다.
번역을 고려하지 않은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2014년 4월 24일자 독서일기에 있다.
* 독서일기 140424 http://blog.aladin.co.kr/maripkahn/6987532
* 독서일기 140425 http://blog.aladin.co.kr/maripkahn/6989252
앞선 독서일기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꽤 본말론적 경향을 갖고 있다. 소설에서는 주제와 주제를 뒷받침하는 줄거리/구성을 중요시 한다. 문체를 포함한 기타의 것은 그 다음이다. 번역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에 손상을 입히면 안 된다. 매끄러운 번역, 적절한 용어 선택은 역시 내용에 비해 평가 대상에서 뒤로 밀린다.
이러한 나의 평가 기준을 적용해 보면, 책세상에서 출판된 <이방인>과 새움에서 출판된 <이방인>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새움에서 출간된 <이방인>의 앞부분에서는 조금의 차이를 느꼈다. 비유해서 이야기하면 책세상에서 출판된 <이방인>이 와사비가 많은 초밥이라면, 새움에서 출판된 <이방인>은 와사비를 좀 덜어낸 느낌 정도. 독서를 진행하면서 그마저 느낌이 옅어졌다. (첫 번째로 읽은 책세상 <이방인>에 대한 인상이 각인되어 그럴 수도 있겠다.)
새로 번역된 새움 <이방인> 글에 대한 느낌은 표맥님의 글에, 번역 논쟁에 관한 느낌은 다락방님의 글에 동감하며 내 수준을 넘는 총평에 관해서는 나귀님의 글에 글에 동감한다.
* 이방인이 되고 만 <이방인> 읽기 ... http://blog.aladin.co.kr/aspire/6993404
* 새움 이방인(과 그에 따른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 http://blog.aladin.co.kr/fallen77/6992195
* 칼은 휘둘렀지만 옷자라만 베어버렸네... http://blog.aladin.co.kr/budapest/6986471
논란 중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정당방위’다. 이것은 번역 문제로 볼 수 없다. 작품 해석의 문제다. 이것은 또한 까뮈가 정당방위, 또는 정당방위가 아닌 것으로 의도했건 소설로 서술된 내용으로 판단해야 맞다. 정당방위는 (이 경우는 책에 서술된) 상황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다. 새움의 <이방인>에 나온 글만 가지고 내가 판사라면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칼에 반사된 햇빛을 보고 총격을 가했는데, 이것이 어떻게 정방방위인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자. 어느 나라 시내에서 데모가 있었고, 데모를 진압하는 공권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데모에 속한 어느 사람이 병을 들고 있었는데, 그 병에 햇빛이 반사되어 공권력을 집행하는 공무원 눈을 부시게 했다. 위협을 받은 공무원은 발포를 했다. 이것이 정당방위인가?) 번역을 떠나 소설의 흐름으로 보건대, 정당방위가 아닌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칼날의 반사된 햇빛이라는 해석이 위트wit있게 보이는 한다.)
뫼르소는 두통과 햇빛에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 두 가지를 엮어 나는 편두통 질환을 떠올렸다. 살인 있던 날에 뫼르소는 음주를 하였다. 뫼르소에게 확실히 광선과민성photophobia는 있는 것 같아 가능성 있는 질환을 인터넷 검색해 봤으나 딱히 어울리는 질환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총격과 2~5번 째 총격사이에 설명이 정확하지 않은 것을 기억상실증으로 보고, 간질의 가능성도 고려해봤다. 역시 딱 맞는 것은 없다. 어째거나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라면 해석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해석을 적용한다면 나의 실존주의적 해석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신경과/정신과 질환이 없었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단지 광선과민성 증상이 있었다. 이것만으로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
<이방인>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소설이다. 주인공을 정상적인 사람, 이성적인 사람으로 상정하고 해석하는 것과 나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주인을 해석하는 것.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원작의 의도는 까뮈만 알겠지.) 뫼르소는 솔직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솔직함이 자기믿음에 근거한 (예를 들면 리플리 증후군 같은) 솔직함이라면 살인의 동기가 햇빛인지 칼날에 반사된 햇빛인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역자 노트에 관해 의견을 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모두 서술하면 역자 노트만큼 분량의 독자 노트가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예로) 번역에 대해 한 가지만 내 의견을 표명해 본다. 출발어 프랑스어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므로 도착어에 한정하여 한국 상황에 맞춰 보겠다.
전보 내용에 관해 이정서씨는 ‘근조’를 ‘삼가 애도함’이라고 풀어 번역했는데, 어색하다. ‘전보’라는 상응하는 단어는 ‘근조’가 더 어울린다. 내가 초등학교(당시에 국민학교)에 다닐 때, 수업시간에 전보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전보는 글자 수대로 비용을 지불하므로 존칭도 없고, 의미만 전달 수 있다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단어가 사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프랑스라고 달랐을까?) 내가 양로원 직원이었다면 ‘**일 모친 사망’으로 전보를 쳤을 것 같다. 이정서씨처럼 번역을 하고자 했다면, ‘전보 한통을 받았다’고 하지 말고 ‘연락을 받았다’라고 의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