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에 관한 생각
번역에 대해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일간지 신문기사(이미도씨 등의 대담)를 읽고 나서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창작/창의성이 없는 나에게는 번역도 대단하게 보였다. 한참 뒤 번역에 대한 다른 글을 읽었는데, A라는 원문이 B와, B와는 다른 의미 C로 번역되었을 때, B와 C가 동시에 맞을 수 없다는 글을 읽었다. 언뜻 보기에 모순처럼 보인다. 창작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런데 창작으로 여겨지는 번역이 옳고 그름은 있다고 주장한다.
예문 ; 학생들이 흡연을 하다가 선생님이 오시는 것을 발견했다. 한 학생이 친구들에게 “토끼자!”라고 외쳤다.
위 글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할 때, ‘토끼자’라는 문장을 “Let's be the rabbits!”라고 번역했다면 옳은 번역일까. “Run away!”라고 했다면 뜻에 맞게 번역했을지 모르겠지만, ‘토끼자’의 비속어 어감을 살릴 수 있을까. 살릴 수 없다면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영사전에는 ‘도망가다’에 show one's heels, cut one's lucky, haul it 등의 어구도 보인다. 어느 것이 이 상황에 맞는 번역인가?
나는 ‘죽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어구에 ‘die’, ‘pass away’, ‘kick the bucket’ ‘expire’ 등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책을 읽을 때, die는 ‘죽다’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pass away’는 돌아가시다. ‘kick the bucket’은 ‘뒈지다’, ‘expire’는 ‘사망하다’를 떠 올린다. 나는 ‘pass away’에 대한 번역을 ‘죽다’로 하였다면 미숙한 번역으로 생각할 것이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 미숙함을 틀렸다고 판단할 것이다.)
사실 번역의 창작성이나 다양성은 <Real speaking Manual 리얼 스피킹 매뉴얼 ; 정치편>을 책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국어로 된 한 문장이 다양한 영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paraphrase라고 하여 영어 공부에 꽤 도움이 되는 방법) 그러나 이 paraphrase도 원래 글의 의미를 바꾸면 안 된다.
<한시미학산책>에 어느 한문 문장의 오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한문은 띄어쓰기도 않고, 한자가 중의적으로 사용되고, 땅도 넓고, 역사도 오래되어 당시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역된 내용이 원문보다 더 문학적/철학적인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역을 권장하거나 오역을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도올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와 이경숙의<노자를 웃긴 남자>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번역이 어려운 것은 원문의 언어(출발어), 번역된 언어(도착어)를 모두 잘 알아야 한다. 잘 안다는 것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문화, (사건 당시, 글을 쓸 당시) 상황도 이해해야 한다. 번역할 적절한 단어가 없기도 하다. (이 경우 정답에 근접한 번역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고문古文을 학교에서 배운다. 하물며 외국 서적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가수 이승철 씨는 TV 오디션 방송에서 음학音學은 없고 음악이 있다고 했다.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번역은 음악에 가까울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원작자의 의도에 얼마큼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글을 기준으로 정답이나 정답에 가까운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작가가 죽었다면 원래의 의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논란을 일으키는 이유일 것이다.) 원작자의 의도를 변경하여 더 좋은 글을 썼다면 그것은 번역이라기보다 새로운 글로 봐야할 것이다.
논쟁을 하다보면 원래 논점 이외에 파생되는 논점이 발생한다. 익명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비판을 할 때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나, 비판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완벽할 때만 비판이 가능 하냐 (거칠게 표현하면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 비록 도덕적 해이(?)가 있지만 기득권에 대항하는 부수적 효과를 볼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나, 등. 불공정은 명성이 있는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에도 있고, 선발번역과 후발번역에도 있다. 각자의 선호에 의해 공정성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아닐까.
(201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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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움에서 출판된 <이방인>이 알라딘 도서 판매 1~2위를 하였다. 판매에 비해 서평/독후감이 별로 없다. (두 분의 글만 많다. 다수가 꼭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수가 믿는 믿음, 잘못된 믿음(리플리 증후군?)일 수도 있다.) 번역 논쟁을 통해 호기심 때문에 판매되었거나, 책이 어려워 독서가 진행이 안 되거나, 읽고 나서 글로 정리할 만큼 해독이 안 되거나 ...
현재까지 높은 평점을 준 독자는 비교적 읽기가 쉽고 전체의 내용이 파악할 수는 글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 가독성이 좋은 글이 옳은 번역이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권위에 대한 도전도 긍정적이다. 반면 이런 분들조차도 역자 노트에 관해서는 (오류의 지적이 아니라 공격이라는) 부정적 판단을 하는 것 같다. 이왕? 많이 팔린 책이니 알라딘 마이리뷰나 풍성하게 올라왔으면 좋겠다. 이 책을 구입할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이즈 마케팅에 휘둘린 것인가.)
(새움 <이방인>의 역자 노트와 알라딘에 jaibal 님이 올린 새움 <이방인>의 역자노트에 반론도 정리되어 두 글을 묶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결국에는 독자가 판단하게 되지 않을까.)
‘싸이렌-뱃고동’, ‘요청하다-요구하다’에 관해 (내용을, 특히 문맥, 상황을 이해하여 어느 단어가 더 적절한지 판단할 수 있겠지만,) 논란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정당방위’ 논쟁은 번역 논쟁이라기보다 책 자체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논란이 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된 ‘이방인’을 읽고 뭐라고 이해했는지 보면 금방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은 한국어와 무관하니 말이다.)
(2014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