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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협지 - 전10권 세트
와룡생 지음, 이선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 첫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더 행복할까?
초등학교 5학년 전 후때의 일입니다. 당시 공중파 방송은 동양방송 TBC, 한국방송 KBS, 문화방송 MBC 3사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채널이 더 있었는데, AFKN입니다. 흑백 화면이었고 채널은 로터리 방식이었습니다.
방과 후에 한국 방송은 시작되지 않았고 초등학교 고학년이라 영어에 슬슬 관심 같기 시작한 터라 AFKN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만화영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이 변신을 하는데, 새 모양의 복장을 하였습니다. 리더격인 남자가 타고 다니는 비행기는 햇빛 속에서 전투기로 변합니다. 영어를 모르니 대사를 모르고 대사를 모르니 줄거리를 모르고. 화면만을 보고 막연한 기대감에 대단한 줄거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화면도 멋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입학 후 이 만화영화는 독수리 5형제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방송에서 방영을 하였습니다. 중학생이 된 후에 본 이 만화영화는 그저 그랬습니다. 이 만화영화를 대학교 졸업할 때 쯤 다시 보게 되었는데,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습니다. (속된 말로) 유치찬란하였죠. 옆에 있던 친구는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저런 것을 보고 좋아했단 말이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화면도 왜 그렇게 조악하던지.
만화 영화가 모두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초등학교 저학년때, 중학교 3년에, 그리고 대학교 졸업할 때 쯤, (물론 중학교 때나 대학교 때는 몇 편 못 봤지만) 모두 3번을 봤지만 한결같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끔 ‘알프스의 하이디’나 ‘신밧드의 모험’ 만화를 본다면 ‘플란다스의 개’와 같을까 아니면 ‘독수리 5형제’와 같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읽은 <군협지>는 통속적인 무협지와 느낌이 달랐습니다. 우선 2단 세로쓰기로 되어 있었고, 삽화도 멋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술에 대한 묘사가 세밀한데, 대개 간단하게 ‘무슨 무술로 10합을 겨뤘다.’라고 서술되지 않고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거승은 상대방이 맹렬히 공격해 오는 위세를 보고는 감히 얕잡아 볼 수 없겠다고 느꼈던지, 급하게 몸을 옆으로 홱 돌리고 오른손을 번개같이 들어 서원평이 가로 후려 때리는 왼손을 막고 곧이어 그 손으로 휘진청담식(揮塵靑談式)으로 바람을 베듯이 맹렬히 오른쪽 팔을 휘둘렀다.
서원평은 급습해 오는 상대방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순식간에 손을 위로 휘두르며 덤볐는데, 오른손으로는 낭타초암법(浪打礁岩法)으로 두 가지를 병용해서 한 가지 술법으로 반격했다.
이와 같은 묘사는 현장감을 주면서 글 자체가 치밀함을 보여 줍니다. 고등어 잡는 그물을 보다 멸치 잡는 그물을 본 느낌이랄까. <의천도룡기>가 수십년 동안 진행된 이야기라면 <군협지>는 일년 정도 기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줄거리가 엉성하다는 느낌입니다. 오히려 제가 이전에 읽은 부분이 소림사 장경각에서 탈출한 직후까지 읽었기 때문에 막연한 줄거리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작품에 대한 아쉬움과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무협 소설을 읽었다는 즐거움이 교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