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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05. 14) 왜 책을 읽는가

“50여년 전 이야기이다. 어떤 박문(博文)·다식(多識)으로 자부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고금의 어떤 저적(著籍)이고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했다. 홍명희 벽초옹은 그를 평하여 ‘아무개는 남의 서문만 읽어 행세하는 친구였지’ 하곤 했다. 이는 남의 ‘서(序)’만을 읽고 그 원전을 독파한 듯이 행세하는 얕은 지식의 소유자들에게 일퇴를 내린 것이다.”

-외부로부터 불어온 독서열풍-

7년전 타계한 연민 이가원 선생이 ‘한국의 서발(序跋)’ 머리말에 쓴 글이다. 물론 책의 서문만 읽고 다 읽은 듯이 행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선생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완벽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서(序)’의 번역이 있기 전에 그 원문이 있고, 원문이 있기 전에 그 원전(原典)이 없지 않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며 문집의 서·발문을 번역한 것은 책의 원문 읽기에 나아가기를 권면하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오래전에 사둔 책을 다시 펼친 것은 ‘책읽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다. 사실 요즘만큼 책읽기가 운위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언론사·시민단체 등이 잇따라 캠페인을 벌이고, 그 때문인지 기업체·지자체·관공서에서 독서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개권유익(開卷有益)’.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익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독서 캠페인으로 책읽는 풍토가 확산되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활자문화까지 일으켜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쯤에서 물어보자. “왜 읽느냐?”고.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까’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많은 대답이 돌아온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모두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들이 아닌가.

그렇다. 책읽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신의 것이 아니듯, 지금의 열기는 책읽는 사람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읽는 사람의 대부분은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끼고, 손수 책을 고르며, 책읽기의 방법을 터득해 가는 게 아니다. 혹시 누군가가 꾸며준 서재에서, 남이 공짜로 보내준 책을 생각없이 읽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과 세상을 바로보는 일-

너는 얼마전 한 인사가 “기사를 정독하다 보면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효과를 얻을 때도 있다”고 말한 인터뷰를 접하고 의아해 했다. 그 인사는 신문 서평기사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앞서 벽초가 비판했던 ‘서문’만을 읽는다는 ‘아무개’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서문이 고전의 원문을 다 말해주지 않은 것처럼, 어떤 서평기사도 책 전체의 내용과 아우라를 전해줄 수는 없다. 서평은 서평일 뿐, 중요한 것은 책과 씨름하는 일이다.

작금의 독서 캠페인의 열기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왜 읽는지’에 대한 철학을 갖는 일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2005년 한해 출협에 납본된 신간은 4만3586종이었다. 하루 평균 120종의 새 책이 쏟아진다는 얘기다.

지천으로 깔려있는 게 책이지만 ‘책읽기’의 철학을 다룬 서적은 찾기 힘들다. 한 독문학자로부터 철학자 볼프강 이저의 ‘읽기 행위’(Der Akt des Lesen)가 책읽기를 철학적으로 논한 책이라고 들었지만,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독서행위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한 모티마 아들러의 ‘자유인을 위한 책읽기’(How to Read a Book)는 20년 전에 나온 뒤 절판됐다.

책읽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저술은 주희의 ‘독서법’이다. 전 140권의 ‘주자어류’ 가운데 제10권·11권으로 들어간 ‘독서법’은 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의 공부와 독서의 철학을 담고 있다. 이이와 이황, 박지원, 이덕무, 정약용 등 조선조 학자들이 설파한 독서론의 뿌리가 바로 주희의 ‘독서법’이다.

주자에게 독서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도, 시간 때우기 수단도 아니다. 단순히 ‘글을 보는(看文字)’ 것 이상이다. 자기를 돌아보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맥상의 틈새를 읽어야 한다’. 그래서 숙독이 강조된다. 거듭 깊이 생각하며 읽으라는 주문이다. 주자는 현실적 문제의식 없이 행해지는 독서에는 비판적이었다. 그가 독서론을 ‘독서는 배우는 사람의 두번째 일이다(讀書乃學者第二事)’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자에게 독서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사는 일, 그리고 현실을 바로 아는 일이었다. 독서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조운찬 문화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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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30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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