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정말 책이 비싸서 책을 못 읽는 걸까?

책의 "가격" 때문에 독서를 마음껏 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책의 "무게" 때문에 아무데서나 펼쳐들고 읽지 못한다는 핑계보다도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가만 따져보면 분명한 오류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재미있는", 또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구매하는 데에는 1만 원, 2만 원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미없는", 또는 "본인이 원치 않는" 것을 구매하는 데에는 1백 원, 2백 원을 아깝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책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물건이나 서비스가 마찬가지다.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1만 원짜리가 아니라 10만 원짜리라도 군소리 않고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사기 싫은 데 꼭 사야 하는 것, 또는 영영 사지 않으리라 작정하는 것은 1천 원, 아니 1백 원짜리라도 사기 싫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술값은 탕진해도 책값은 아끼게 마련이고, 또 어떤 사람은 차(車)값은 아깝지 않아도 술값은 아끼지 않으며, 또 어떤 사람은 책값은 아깝지 않아도 차값은 아까울 수 있다. 결국 만족감이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단순히 액면가만 놓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비싸다" 혹은 "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아무리 책값이 비싸다 한들, 한 달 교통비보다 비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한 달 휴대전화 요금만큼 비싸겠는가. 문제는 "책값은 비싸다"는 통념, 바꿔 말하자면 "책값은 당연히 싸야 한다"는 오해인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책값에 대한 불평은 단지 오늘의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 영국 작가 조지 오웰도 "책값 대 담뱃값"이란 에세이(오웰의 에세이집인 <코끼리를 쏘다>(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2003)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책값에 대한 일반의 잘못된 인식을 따끔하게 꼬집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의 서두에서 조지 오웰은 신문사 편집인인 자기 친구가 어느 공장 노동자들로부터 "당신네 신문은 1실링 6펜스씩이나 되는 그런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책 한 권에 그만한 돈을 쓸 수가 없어요!"라는 불평을 들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 책을 사거나 읽는 것은 값비싼 취미로, 일반 사람들의 경제 수준에 큰 부담이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어, 이에 대해 한 번 상세히 밝혀볼 필요가 있겠다. 독서비가 시간당 펜스 단위로 정확히 얼마가 되는지를 산출하기란 어렵지만, 내 책을 모두 세어 책값을 더해보겠다. 내가 지출했던 다른 다양한 비용을 감안해 보면, 나는 지난 15년 동안의 내 지출을 비교적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을 것 같다. (251-252쪽)
그렇게 해서 오웰은 자신이 구입한 책, 얻었거나 도서권으로 구입한 책, 서평용 도서 및 증정본, 빌려서 아직 안 돌려준 책, 대출한 책 등의 숫자를 센 다음, 그 가격을 모조리(구입한 책은 정가로, 서평용과 증정본 도서는 반값으로 등등) 환산한 다음, 그것 외에도 일간지 두 개, 석간지 한 개, 일요신문 두 개, 주간서평지 하나, 월간지 한두 개 등의 다른 비용까지도 모조리 환산해서 더해 본다. 결국 "15년 동안에 걸쳐, 1년에 약 25파운드"의 비용이 독서비로 지출된 셈이다. 그런데 오웰은 현재 영국의 성인 남성이 피우고 마시는 담뱃값과 술값만 쳐도 대략 1년에 40파운드는 족히 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술, 담배나 영화 관람 같은 다른 오락에 비해 독서야말로 시간당 비용이 가장 값싼 오락 중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오웰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 나는 독서란 값싼 오락 중 하나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어쩌면 가장 값싼 것인지도 모른다. 영국 대중이 책에 지출하는 실질적인 돈의 액수는 얼마일까? 분명히 어디엔가 있을 테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그 수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전쟁 전 우리나라가 연간 약 1만 5천 권의 책을 발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권당 1만 부가 팔린다면, 국민 1인단 직, 간접적으로 연간 약 세 권만을 사는 셈이 된다. 이 세 권의 가격을 다 합해도 1파운드, 혹은 그 미만일 것이다. 이 수치는 내 나름대로 계산한 것이며, 만약 틀렸다면 정정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의 계산이 어느 정도 옳다면 식자율 1백 퍼센트이며, 성인 남성 한 명의 평생 담뱃값이 인도 농부 한 사람의 평생 생계비보다 더 많은 이 나라에서, 이 수치는 결코 자랑스러운 기록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책 소비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계속 떨어진다면, 그것은 책을 사든지 빌리든지 간에 책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독서가 개싸움 구경을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거나 술집에 가는 것보다는 더 재미있는 오락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57쪽)
하여간 문제는 "내켜하지 않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들이려니까 생기는 것이다. 자꾸 옆에서 "읽어라, 읽어라" 하니까 책값이 비싸네 책이 무겁네 하는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닥달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 부추기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사는 사람에게는 책값이 싸거나 책이 무겁거나 하는 불평이 나올 리 없다. 예나 지금이나 책 읽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뻑하면 " OECD 국가에서 최저 수준의 독서율" 어쩌구 하는 요상한 잣대를 갖다대고 비교하면 무지막지 엄청난 "독서율 하락"처럼 보이겠지만, 다만 TV며 영화며 인터넷 같은 새로운 매체가 출현한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인이 있으니, 단순히 책 안 읽는 사회를 타박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그렇다고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책 읽는 사람이 많았을까? 단적으로 30년 전에는 출판사 수도 적었고 출간 종수도 적었던 반면, 지금처럼 "밀리언셀러"라는 폭발적인 판매고는 없었음을 고려해 볼 때, 단순히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하다. 무슨 "국민개병의 원칙"도 아니고, "4대 노선"도 아닌 와중에야, 자칭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이 책 읽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나름대로 책 깨나 읽는다는 나로서는 오히려 지금이 좋다. 생산량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종수 하나만큼은 확실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벼라별 책이 다 나오는 요즘 같으면 솔직히 책 읽을 맛이 난다. 물론 옥석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석이 많아지는 것만큼 옥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면,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책을 읽는" 사람은 불평할 틈도 없이 읽고 또 읽는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