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 열림원 / 199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참 인상 깊게 보았는데, 그 다음에 출간된 시집인가 보다.  심부름 다녀올 일이 있어서 지하철에서 봐야지.. 하고 가방에 집어넣은 시집이다.  그런데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버스를 타게 되었다.  버스 안에 앉아서 책을 보자니 울렁증이 생겨 눈을 감았다.

눈 감고 잠이 들었는데, 뭔가 묵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보니, 50대 아주머니께서 내 다리에 기대어 서 계시다.  이 자리에 앉으시라고 비켜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때마침 지하철역이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아까 읽던 뒷부분부터 다시 시집을 펴들었다.  목적지는 쉬이 도착해고 내 안에서 시어들은 춤을 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정호승 시인은 '외로움'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한다.  그가 달팽이를 얘기할 때에도, 꽃을 얘기할 때에도, 눈은얘기할 때에도 시인의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윤동주의 서시"라는 작품 말미에는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라고 맺는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또 외로운 것이니, 사랑하는 것도 곧 외로운 것이다. 언어유희처럼 들리는 이 말이, 어쩐지 나는 마음에 와 닿는다.  나의 해석이 그의 해석과 어찌 다를까는 중요치 않다.  나 역시 외로운 사람이니, 외로운 사람으로서 내게 들어서는 시를 받아들이면 그뿐이다.

"정동진"이라는 시에서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햇살이 되지도 못하면서 해가 되려고 했던, 파도가 되지도 못하면서 바다를 꿈꾸었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시인은 일상의 작은 깨달음조차도 이같은 시적 언어와 표현으로 남다른 감흥을 받을 테지... 어쩐지 부러워서 시새움이 났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역시 인상적이었다.  너에게 전화를 했지만 너는 받지 않는다.  그리 전화하고 받지 않는 전화에 실망할 때마다 석가탑이 무너지고 다보탑이 무너지고 청운교, 대웅전이 무너진다.  석등의 맑은 불도 꺼지자 화자는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스스로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여전히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랑하여 애끓는 마음을, 닿지 않는 마음에 아픈 심정을 적절한 비유로 잘 묘사했다.  일순, 그렇게 종메가 되어 힘껏 칠 만큼 누구를 사랑해 보았는가 자문해 본다.  내 마음은 불국사에 석굴암까지 무너지는 듯하다.

작년 가을에는 직장 컴퓨터 모니터에 "수선화" 전문을 적어서 붙여놓았다.  나뿐 아니라 우리 부서 여자분들에게도 돌리며 함께 시를 나누었다.  지금도 몹시 인상적인 시어들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이 시집의 큰 제목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도 이 시에서 나온다.  날 가장 먹먹하게 만든 구절을 옮겨본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하나님도 외롭다는데, 산그림자조차 외롭다는데, 나의 외로움이 혼자만의 것이라고 아파할 이유가 없다.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된다.  그조차 외로운 까닭이다.

뒷부분의 시는 외로움을 넘어 '쓸쓸함'을 노래한다.  외로움이 곧 쓸쓸함을 동반하고, 쓸쓸하다고 느끼는 것은 곧 외롭다는 증거다.

외롭고 차가운 계절 이 가을에, 그러나 외로워서 마음이 덜 외로운 어느 밤에 이 시집을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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