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뜸의 거리
코노 후미요 지음, 홍성민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상적이었던 리뷰를 보고는 덜컥 구입을 했는데, 정작 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룬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무거운 주제를 접하기에 준비가 필요했던 듯...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 폭탄... 원폭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선뜻 손이 가지 못한 것은, 일부러라도 미워하고픈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될까 봐서 심리적으로 거부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역시, 읽고나서 조금 힘들었다.  작가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어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고 담담히 받아들여질 이야기던가.

너무 아픈 사람들, 앞으로도 계속 아플 사람들... 대를 이어 뿌리치지 못할 굴레를 안고 살아야 할 사람들..

그들은 평화롭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잿더미가 된 사람들이다.  죽은 사람은 죽어서 가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가혹하다. 뿐이던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후대에까지 그 피해가 이어지니, 저주의 굴레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잠시 숨 좀 고르고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작품은 해설까지 포함해서 103페이지다. 몹시 얇은 책인데, 그 안에 연작시리즈로 세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원폭 10년 후인 1955년, 그리고 원폭 2세대가 태어난 1986년, 그리고 그 2세대마저 성장한 2004년의 이야기.

그림체는 전혀 정교하지 않고, 학습만화에 나올 법한 정도의 그림체이다.  글씨가 세로로 써진 내용이 많아서 읽기에 부자연스러워 조금 불편했다.  게다가 과거 회상 씬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고 헤매기도 했다.  나중에 이해를 하고서 다시 보니 회상씬은 그림이 조금 흐리게 인쇄를 했다.  똑같은 장소의 옛날 모습으로 사악 변하는 장면은 꼭 뮤직비디오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 내용을 가지고 한시간짜리 드라마를 만들면 특집 프로그램으로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한 미나미는 원폭 십년 후 23세의 직장인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지 않고 살아지지만 마음 속엔 늘 짐이, 의문이 담겨 있다.  설레이는 사랑이 다가와도 두려움이 앞서고 내가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의문을 갖는 여자다.  직장 동료와 다리 위에서 첫키스를 했을 때, 배경으로 깔리는 수많은 시체 더미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풍경이었다.  도망치듯 달리는 그녀에게 애써 지우려고 했던 옛 생각들이 떠오른다.  담밑에 깔린 반친구를 외면했던 일,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죽고, 언니도 죽었다.  한달동안이나 얼굴이 부어서 눈을 뜨지 못했던 엄마와 살아남았고, 남동생은 고모댁에 보내어 양자 삼게 하였다. 

숱한 고민과 번뇌 끝에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연인에게 말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미안해지지 않도록...

살아줘서 고맙다는 인사에 행복감을 느끼며, 안심하고 돌아온 그녀는 그날로부터 일어나지 못한다. 밥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한다.  죽어가면서 그녀는 십년 전에 죽었던 언니를 떠올렸다.  오래 살고 싶다라는 말을 차마 남기지 못했던 그 언니, 그 마음을 이제 그녀가 갖게 된다.  그리고 끝내, 눈을 감는다.

죽으면서 그녀는 한탄스럽게 생각한다. 

기쁜가요?

10년이 지났지만 원폭을 떨어뜨린 사람은 나를 보고 "해냈다! 또 한 명 죽였어!"

하고 잊지 않고 생각해줄까?

그녀의 마지막 절규를 들으며 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그 원망스런 전쟁을 떠올려본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던, 그리고 서로 등돌리게 했던, 우리에게 분단의 아픔을 남겨주었던 그 전쟁들을 말이다.

두번째 이야기와 세번째 이야기는 같은 제목에 1.2 번호만 붙여서 나왔는데, 고모댁에 양자로 보냈던 그 남동생의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남동생이 늙은 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간에 과거 회상씬이 삽입되어 있는데, 원폭 피해로 머리가 나빠진 어느 여성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 그녀에게 해준 말이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원폭 피해로 돌려선 안 돼!"

그 말이 일어설 수 없을 것 같던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싸움에 결국 지원군은 자기 자신들, 그리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싸매주는 '사람'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원폭의 직접 피해자이니 그 어조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만,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들의 화자는 아무래도 원폭의 2차 피해자 혹은 간접피해자인 까닭에 그 목소리가 조금 더 담담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미약하나마 절망에서 희망으로, 현실의 거부에서 현실의 인정으로 마음이 굽어지는 것 같아 조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후기에서 일본에서조차 히로시마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라는 이야기가 꽤 뜻밖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비극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기억할까 봐 나는 또 두렵다.  그 속에 뼈아픈 반성과 참회는 없는지, 그들 피해자가 아닌 일본 국민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작품의 제목이 '저녁뜸의 거리'인데, 저녁뜸이란 바다와 육지의 기압이 비슷해지는 아침과 저녁에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데 그 시간대를 아침뜸, 저녁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첫번재 이야기의 미나미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저녁뜸일 거라고 짐작을 했는데 사실은 아침 뜸이었고, 그 아침뜸이 끝날 무렵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죽었다.  멈춰 있는 바람과 다시  부는 바람.  그 안에서도 작가는 그들의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 아닐까.

마음은 무겁지만 좋은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다. 

덧글 하나.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투하를 앞두고 고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엄청 역겨웠던 기억이 난다. 한국전쟁 때 맥아더하고는 왜 다퉜는데?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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