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앞부분을 읽다가 중단됐는데, 거기에 작가가 히말라야를 꿈꾸게 되는 이유를 이 작품을 빌어 설명했다. 승민이 그토록 원했던 안나푸르나를 꼭 가야만 했다고. 그곳에 가야만 슬럼프처럼 한줄도 쓰지 못하게 된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작가는 대책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이 안나푸르나로 향했다. 그 이전까지 내가 읽은 정유정의 책은 "28" 하나 였으므로 나는 당연히 '내 심장을 쏴라'의 승민을 몰랐다. 그가 꿈꾼 안나푸르나가 어떤 의미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막연히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얼라!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주연 배우는 이민기와 여진구. 오, 출연진도 좋다. 막강 조연진도 합류했다. "28"을 워낙 인상 깊게 보았으므로 이 작품이 많이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보고 싶었다. 


소설은 흥미로웠다. 28만큼 정제되지는 않았어도, 초기부터 힘있는 문장을 구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캐릭터들도 살아 움직였다. 직접 체험까지 하고 돌아온 정신병원의 세태도 세밀하게 그려냈다. 최근작과 비교한다면 문장에서 덜어냈으면 하는 군더더기가 다소 느껴졌지만, 만약 이 작품을 먼저 읽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분량이었다. 마찬가지로 28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에 대한 만족도는 더 높았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별점 넷을 준 이유다. 이 작품을 먼저 읽었다면 기꺼이 다섯을 주었겠지만, 어쩌다 보니 상대평가가 되어버렸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스물 다섯의 청년 승민과 수명.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친 자가 있다면 전자는 수명이요, 후자는 승민이 될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병원에 숨는 것을 택한 수명과, 출생의 비밀+재산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승민의 만남이었다. 살아온 삶의 방식도 다르고 성격도 판이하게 다른 이 두 사람은, 처음에는 철저하게 수명이 승민에게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강제입원 100일에 닿을 때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단 한 번 뿐인 기회도 스스로 놓을 만큼 서로를 걱정하고 위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음과 양처럼 무척이나 다른 성질의 두 사람이었지만 그 둘이 하나가 되어 이루는 조화가 멋드러졌다. 표면적으로는 워낙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승민이 수명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승민이 최후의 최후까지 승민으로 남을 수 있는 기회는 결국 수명이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역시 두 사람은 음과 양처럼 하나로 묶여도 좋을 법한 관계였다.


책을 다 보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에 대한 평점은 무척 낮았다. 덕분에 기대치를 놓고 갈 수 있었다. 예고편만 봐서는 잘 이해가 안 갔다. 캐스팅 된 두 배우. 특히 이민기는 승민이 책을 뚫고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싱크로율이 높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낮은 평점이 이해가 됐다. 그건 이를테면 웹툰으로는 높이 평가를 받은 강풀 작가의 작품이 영화로 옮겨지면 망하는 것과 비슷한 패턴이었다. 매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원작 소설이 훌륭하고, 거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훌륭하지만, 그걸 그대로 영화에 옮긴다고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소설은 350쪽에 달하는 긴 지면에 캐릭터들을 다 소화시킬 에피소드들을 넣고 엮고 볶을 수 있지만 영화는 기껏해야 두시간이다. 그러니 그 두 시간 동안 관객을 홀릴 수 있게끔 다시 각색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게을리 했다. 혹은 능력이 없었거나.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냥 그랬다. 특히 주인공들이. 싱크로율은 높은데 연기가 어색하다. 연기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본이 별로였던 게 아닐까. 나야 원작을 읽었으니 저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사이사이의 이야기들을 알지만, 그런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들은 뜬금없지 않을까? 그래서 더 웃겼어야 할 조연들이 덜 웃기고, 더 진지했어야 할 이야기들의 진정성이 떨어졌던 게 아닐까. 원작만큼이거나, 원작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원작에 못 미치는 영화는 왜 이리 많은 것일까. 아쉽다.


다만 영화에서 보트 타고 호수를 가르는 장면은 시각적 효과가 주는 시원함이 있었다. 그 부분은 같이 응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정신과 전문의로 정유정 작가가 직접 출연했는데, 워낙에 샤프한 인상이어서 분위기에 잘 맞았다. 까메오 출연 반가웠어요!


치매 기운이 있어서 간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만식씨를 염소가 기억을 뜯어먹었다고 표현했다. 기수였던 그가 승민을 향해 '또별'이라고 부르며 매달렸던 게 기억에 남는다. 승민이 찢겨진 바지를 입고서 트위스트를 췄던 것, 수명 역시 문을 통과하면서 트위스트를 추었던 게 유난히 좋았다. 같이 노래하며 박수를 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수명의 선택. 그러니까 승민을 위해서 그가 선택했던, 그래서 그가 치러야 했던 희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불과 100일 동안 함께 했던 사람인데, 그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온통 뒤흔들었다. 이제껏 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던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으로 한발자국 내딛게 했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선택이고 도전이고 희생이었다. 서로에게 고마운 인연이다. 


재밌게 읽었는데 28 때와는 달리 딱히 북다트를 꼽지 않았다. 갖고 싶고 담고 싶을 만큼 홀릴 문장은 적었다는 의미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갖고 있는 7년의 밤으로 바로 시선이 옮겨 간다. 읽을 거리가 아직 남아 있어서 기쁘다. 예전 작품 중에 절판된 책이 많은데 다시 출간됐으면 좋겠다. 일단, 읽다가 중단된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먼저 소화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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