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SION 과학

제 2079 호/2014-03-05

[이달의 역사] 그 엄마에 그 딸, 퀴리

‘X선’을 뢴트겐(Wilhelm Conrad Roentgen, 1845~1923)이 발견한 바로 다음해인 1896년에 앙리 베크렐(Antoine-Henri Becquerel, 1852~1908)이 ‘방사선’을 발견한다. 인류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발견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베크렐의 발견은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에 의해 그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1867년 11월 마리 퀴리가 바르샤바에서 태어날 때 폴란드는 독립국이 아닌 러시아의 한 지방이었다. 러시아는 폴란드 문화를 짓밟기 위해 폴란드 말도 쓰지 못하게 할 정도로 탄압했다. 마리 퀴리는 김나지움(Gymnasium, 중등교육기관)을 모든 과목에서 1등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 여자를 받아주는 대학교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891년에 프랑스로 옮겨 파리 대학교에서 입학했고 여자로서는 처음이자 수석으로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 학위(1893년)를 받았다. 또한 1894년에는 2등으로 수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화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만나 두 사람은 1895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1897년에는 베크렐이 마리 퀴리에게 박사 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도록 권유하자 마리는 이를 받아들이고 피에르도 공동 연구에 동참한다.

■ 마리 퀴리의 억척스런 연구

1898년, 마리 퀴리는 산화우라늄을 함유하고 있는 역청 우라늄광(동의어: 역청 우라늄석, 피치블렌드, pitchblende) 샘플을 마구잡이로 조사하면서 순수한 우라늄보다 훨씬 큰 방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역청 우라늄광 안에 또 다른 원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억척스러운 노력으로 미량의 미세한 흑색 분말을 얻었는데 이 분말은 우라늄보다 400배나 강한 방사능을 지니고 있었다.

마리는 자기가 발견한 새 원소를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고 명명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폴로늄을 분리했는데도 남은 물질에 여전히 방사능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역청 우라늄광에는 미지의 원소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라듐이었다. 라듐의 방사능은 우라늄보다 무려 300만 배 더 강한 방사능을 갖고 있었다.

1903년 5월에 박사 학위를 받은 마리는 피에르와 함께 영국왕립학회가 주는 유명한 험프리 데이비상을 받았고 곧바로 피에르,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마리는 그야말로 신화적으로 신분이 바뀐다. 그러나 1906년 4월 피에르가 파리 거리를 건너다가 화물차에 치여 사망했다. 그녀에게 남편이자 공동 연구자인 피에르의 사망은 그녀에게 슬픔을 주었다. 하지만 마리는 피에르가 소르본 대학에서 맡고 있던 강좌를 이어받았다. 소르본 대학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였으며, 1908년에는 정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마리 퀴리는 1911년에 새로 발견된 원소들의 화학적 성질을 밝혀낸 공로로 두 번째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1903년의 노벨상은 퀴리부부가 처음 발견한 라듐 화합물 때문에 받았고, 두 번째 받은 것은 순수한 라듐을 분리한 공적으로 받은 것이다.

■ 만병통치약으로 변한 라듐

라듐이 발견된 초창기에 라듐에 대한 열풍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에 라듐은 보석의 색깔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산소를 치료효과가 있는 오존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리해줄 수 있다고 알려졌다. 더구나 라듐으로 원하는 만큼의 금을 생산해 낼 수 있으며 나병이나 매독 같은 질병들도 치료할 수 있다고 선전되었다. 심지어는 망막에만 결함이 없다면 장님들도 다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소문도 따라 다녔다. 각국에서 방사능이 함유된 압박붕대, 솜, 머드, 입욕제, 연고, 치약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문제는 라듐이 천사의 물질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라듐이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은 곧바로 관찰되었다. 베크렐은 마리 퀴리가 추출한 라듐을 며칠 동안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이 라듐 때문에 젖꼭지 바로 옆에 궤양이 생겼다. 이 상처는 여러 달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는데 1908년 베크렐이 사망한 요인도 이 때문으로 추정한다.

베크렐의 이야기를 듣고 죽기 전의 피에르 퀴리도 라듐의 부작용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자신의 팔뚝에 소량의 라듐을 묶었다. 그랬더니 몇 시간 후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4일 후 수포가 생기고 5일에는 궤양으로 전이되더니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쥐에게 라듐방사실험을 하자 쥐들은 마비 증세를 보이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그러나 부작용은 라듐 열풍에 녹아들어 완전히 무시되었다.

오랜 시간 라듐을 연구한 마리 퀴리는 연구를 계속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마리는 붉게 타는 방사능 물질을 침대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셔츠의 주머니나 바지의 뒷주머니에 라듐염이 들어 있는 시험관을 넣고 다녔기 때문에 주머니가 있는 곳마다 불에 덴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시험관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무지로 인한 용감성과 열정 때문이다. 피에르 퀴리도 같은 상황이었다고 하나 사고로 일찍 사망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을 뿐이다. 여하튼 마리는 라듐 추출 실험 당시에 노출되었던 방사선 때문에 손이나 손가락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다. 특히 오른쪽 손가락은 화상이 심하여 펜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피로감이나 오래 전부터 시달려 온 통증들은 그녀가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생긴 과로의 여파라고 생각했다. 1923년 시력 장애가 생기면서 1930년까지 무려 네 차례나 백내장 눈 수술을 받았다. 백내장은 방사능 영향으로 생기는 첫 징조이다. 그녀는 1934년 알프스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는데 병명은 노출된 방사능 때문에 생긴 백혈병이었다. 사위인 졸리오가 마리의 실험 노트를 조사해보니 엄청난 양의 방사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1894년 이후 40년 동안 연구생활 중 그녀가 쏘인 방사선양은 약 200Sv(시버트)로 추정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받는 방사선량의 600억 배다.

많은 사람이 마리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그중에서 아인슈타인은 마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글을 남겼다.

‘힘과 의지와 순수함. 자신에 대한 철저한 엄격함. 뚜렷한 주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 이 모든 것이 한 개인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 그녀가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담한 직관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어려움 속에서 헌신적으로 집요하게 파고든 노력의 결과이다.



■ 이렌 퀴리, 어머니의 뒤를 잇다

마리 퀴리의 딸 이렌 졸리오 퀴리(Irene Joliot Curie)와 사위인 프레드릭 졸리오 퀴리(Frederic Joliot Curie)도 마리 퀴리의 연구를 계속하여 1935년에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렌과 졸리오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비방사성 원소가 실험실에서 방사성 원소로 변환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인공 방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는 딸과 사위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1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렌 퀴리도 실험실에서 방사능에 과다 노출된 결과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결국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던 라듐은 1931년에 시판이 금지되었다.

마리 퀴리와 이렌 퀴리는 현대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방사능의 실체를 알려주었다. 그 연구는 그들에게 커다란 위험을 안겼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방사능이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줄을 알고도 연구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즉, 방사능의 위험성을 몰랐기에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벨상만 받을 수 있다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노벨상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고 해서 수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처럼 마리 퀴리는 그 방사능이 인체에 위험한 것을 몰랐고, 연구에 연구를 가해 노벨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렌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그녀는 마리 퀴리의 건강상태와 방사능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방사능을 연구했다. 마리 퀴리를 이어 방사능에 대한 과학적 열정과 헌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와 이렌 모두 방사능을 연구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사능은 백혈병을 포함한 암 치료에 이용된다. 인공 방사능 물질인 요오드131은 갑상선암을 진단하는 데 사용되며, 소변 속의 코발트60을 파악함으로써 악성 빈혈을 진단할 수도 있다. 방사선 치료는 X선, 감마선과 같은 파동 형태의 방사선, 또는 전자선, 양성자선과 같은 입자 형태의 방사선을 이용해 암과 같은 악성 질병의 성장을 지연시키거나 멈추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파괴시키기도 한다.

마리 퀴리와 이렌 퀴리가 굳이 백혈병에 걸리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대인들은 그들과 같은 과학의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에 방사능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알고 그 대안을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대안이 과학을 담보로 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데 과학의 순교자는 더욱 돋보인다.

글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참고문헌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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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와 우연의 과학사』, 페터 크뢰닝, 이마고, 2005
『천재 과학자들의 숨겨진 이야기』, 야마다 히로타카, 사람과책, 2005년
『사이언스 퍼스트』, 로버트 E. 아들러, 생각의 나무, 2003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송성수, 북스힐, 2012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사과나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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