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2 소설 조선왕조실록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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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군의 야망이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숲으로 사라졌던 매가 날아올랐다. 발톱엔 토끼 한 마리를 움켜쥐었다. 날갯짓이 힘찼다.
"삼봉, 자네보단 작겠지."
"그럼 우리 셋 중 가장 작겠군요. 제 욕심이야 포은 형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요."-19쪽

"슬픔을 느끼지 않고 이치만 따지기 때문에 백성이 정치가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임을 당하는 일,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도는 일, 또 수십 년을 함께 산 황소가 갑자기 숨을 거둔 일, 이 불행들을 어떤 이치로 명쾌하게 설명하시렵니까? 우는 것 외엔 답이 없는 일도 꽤 많습니다."
비로소 그 농부가 땅만 갈고 곡식만 심는 이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66쪽

반백 년 살며 마음에 머문 문장들을 꺼내 정리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고(庫)를 가지런히 청소한 기분이 든다. 오늘부터 찾아드는 문장은 강제로 등을 떠밀어서라도 날려 보내리라. 많이 지닐수록 어느새 많이 추한 나이다.
-105쪽

너는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라. 왕을 중심으로 역사를 쓰거나 읽지 마라. 왕은 다만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옳다 그르다 결정만 내리고, 그 결정이 잘못되었을 때는 책임을 질 신하를 고르는 데만 급급한다. 백성이 왜구에, 돌림병에, 굶주림에 죽어 나가도 왕은 애석한 표정만 지으며 귀신들에게 도움을 바라는 연기나 피워 올린다. 도적을 물리쳤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풍년을 이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았다면 백성이 한 일이다. 고행은 전부 백성이 하고 영광은 모두 왕이 누리니, 어느 백성이 그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떠받들겠는가.

너는 왕이 부르면 그 이유를 미리 살피고 꺼내 놓을 이야기와 왕이 던질 질문과 또 거기에 합당한 답을 고려하고 가라. 백성이 부르면 우선 가라. 고민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107쪽

너는 명심하라,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썼음을.
-108쪽

너는 왕의 신하로 만족하지 말라. 너는 왕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너는 함께 죽을 벗이 세 명 있는가? 있다면 멋진 삶이다. 두 명 있는가? 있다면 넉넉한 삶이다. 한 명 있는가? 있다면 헛되지 않은 삶이다.-109쪽

정처 없는 희망은 확실한 절망보다 절망스럽다.
-144쪽

기억의 관절이 비틀렸다. 내일의 성문들이 벽처럼 닫혔다. 단어나 문장이 되지 못한, 타인에게 전달하기 힘든, 그러나 한 생애를 이미 살아버린 쭈글쭈글한 외마디들이 그 벽 아래 시체처럼 쌓였다. 이것은 배신이다. 정몽주를 잃는 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고 믿었건만.
-175쪽

한 입으로 두말하고도 지탄받지 않는 멀쩡한 이가 누구인가. 군왕이다. 백성과 관리들은 말 한 마디 잘못했다 하여 옥에 가두고 귀양을 보내고 때론 죽이지만, 왕은 말을 바꿔도 된다. 착각이나 실수였다 둘러대도 된다. 그래서 나는 왕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 왕이 요나 순이라고 해도, 그들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다. 그 때문에 누군가 지독한 상처를 입는다. 바로 오늘 나처럼.
-201쪽

이방원이 포은을 해치면 혁명의 완성은 더욱 더딜 것이야. 어쩌면 영원히 실패할지도 몰라. 포은과 내가 함께 법과 제도를 만들어 공표한다 해도 10년은 족히 걸릴 일이니까. 한데 포은이 없다면, 이 일은 20년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지. 포은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긴 어렵네. 조준은 경제에만 밝을 뿐이고 하륜은 지리에만 조금 뛰어나며 윤소종은 공맹의 말씀을 깊고 넓게 해석하는 솜씨는 탁월하나 백성의 처절한 고통을 어루만지는 데까진 이르지 못했네. 남은은 배짱이 두둑하지만 정밀하지 못하고 남재 역시 마찬가질세. 포은밖에 없어.
-201쪽

정안군 이방원은 포은을 참살하여 내 발등을 찍었다. 대장군 앞으로 보낸 서찰도 막고 망량까지 죽였다. 나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림으로써 그 빚을 갚아 주었다. 정안군과 나는 서로의 이름만 듣고도 심장을 뜯어 먹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는 사이가 되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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