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장바구니담기


긍정적인 태도를 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되고, 당연한 것이 되다 보니 다르게 생각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상황에서도 같은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할 때도 있지만 중이 절을 고쳐야 할 때도 있는 게 세상 아닌가.
-5쪽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대표를 뽑을 때는 물론이고,
집이나 음식을 나눌 때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할 때도 사람들은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연달아서 이기거나 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규칙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영원히 지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이 규칙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마을의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다친 후로 주먹을 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주먹만 내는 것으로도 웬만큼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그가 주먹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그와의 대결에서는 모두가 보자기를 내었습니다.-45쪽

농장 주인의 말에 모두들 곰곰이 생각을 했지만 자기도 좋으면서 남들은 불만을 가지지 않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열다섯 냥 받는 일꾼 하나가 체념하듯 내질렀다.
"그러면 차라리 작업반장한테 줘 버리쇼. 그 사람이야 어차피 몇 냥 더 받아 봐야 티도 안 날 만큼 돈이 많으니 어느 누가 불만을 가지겠소."
모두들 그게 낫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작업반장은 매달 천 냥하고도 스무 냥 정도를 더 받게 되었다.
다른 일꾼들은 뭔가 알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지만, 다들 그만 잊기로 했다.-77쪽

혼자가 된 빨강이는 일이 두 배나 많아지긴 했지만 즐겁게 일했습니다.
농장 전체를 책임지는 솜씨 좋은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주인은 훨씬 더 즐거웠습니다.-91쪽

어느 날 무료함과 외로움에 지친 조물주는 자신을 즐겁게 해줄 개를 만들었다.
개들은 당당하면서 아름다웠고 온순하면서 용맹했다.
조물주는 그의 창조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개들은 그들의 주인처럼 무료함에 지쳐 갔다.
그들에겐 그들의 용맹과 당당함을 증명할 무엇이 필요했다.
조물주는 자신의 사랑스런 개들을 위해 돼지를 선물했다.
돼지를 받은 개들은 늘 웃었고 늘 행복했다.
돼지들은 매일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죽었다.
끊임없는 고통과 두려움에 지친 돼지들은 조물주에게 간청했다.
"개들을 없애 주십시오."
"내가 그들을 아낀다."
"그러면 저희에게서 개들을 멀리 떼어 놔 주십시오."
"내가 그들을 아끼고 그들이 너희를 즐긴다."
"그렇다면 저희에게 이 고통을 이길 무언가를 주십시오."
연민을 느낀 조물주는 돼지들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다.
망각과 웃음.
선물을 받은 돼지들은 여전히 고통받았지만 개처럼 웃을 수 있었다.
웃으면서 잊었고 잊으면서 웃었다.
그래서 개처럼 행복했다.-125쪽

"세상은 늘상 변하기 마련이야. 지금까지 뜨거웠던 적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란 법이 있나? 환경이 변하면 거기에 적응해서 살면 되는 거야. 변화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들이나 괜한 불평을 늘어놓지."-150쪽

"요 근래에는 나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했어. 하지만 나는 곧 이것이 단순한 고통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이 고통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서 나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만하며 살았는지 반성하게 해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지. 또한 이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무한한 용기가 샘솟아 더 이상 무엇도 괴롭거나 두렵지 않게 되었지. 이 고통은 아마도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일 거야."
개구리들은 모두 그를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들도 고통을 선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민한 개구리는 고통을 참을 수도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냄비를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바보들아, 뜨거운 건 그냥 뜨거운 거야.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개구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민한 개구리처럼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이 순간의 소중함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152쪽

숲의 표면은 그대로였지만 저절로 순환하던 숲의 역사는 멈춰 버렸다. 나무들이 커다란 몸을 유지하는 데만 온 힘을 쏟느라 새로운 씨앗을 떨어뜨리지도 않았고, 설사 새로이 싹을 틔우는 씨앗이 있다 해도 한 줌의 햇빛조차 흘려버리지 않을 만큼 빼곡한 잎의 성벽에 막혀 숲의 아래쪽은 늘상 밤보다 어두웠기 때문에 어떤 새싹도 자랄 수 없었다.
어둠을 싫어하는 동물들, 꽃을 찾던 동물들도 다른 숲을 찾아 떠났다. 새들이 사라지자 나무를 먹는 벌레들만 폭발하듯 늘어났다. 벌레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패배한 죽어 쓰러진 나무들의 썩은 몸만이 숲에 남은 유일한 양분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먹고 먹이며 순환하던 나무들은 이제 이웃의 나무가 죽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삶 또한 머지않아 모두의 파멸로 끝이 날 터였다.-1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