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65세의 조각(爪角). 겉으로 보기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 정도로 보이지만 그녀는 40년 이상 업계에 몸을 담은 전문 킬러였다. 그들의 언어로는 방역업자로 통한다. 어린 시절 구구절절 사연 많은 이야기는 건너 뛰자. 여러 우여곡절을 거쳤고 갈곳 없는 그녀를 받아준 것은 류였다. 류의 본업을 모르던 조각은 자신을 덮친 주한미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웠고, 그 찰나의 솜씨를 알아본 류가 그녀를 전문 킬러로 키웠다.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류였지만 조각은 그를 마음에 담았다. 


그러나 업계의 속성상 적이 많은 그들이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된 류가 안아주던 밤, 그는 지킬 무언가를 만들지 말자고 말했다. 그렇게 말했던 류도 누군가를 지키며 제 목숨을 버렸다. 이 바닥에서 연민은 가장 불필요했고, 지켜야 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제 생명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었다. 

그렇게 무엇도 남기지 않고 무엇도 아끼지 않은 채 40여 년이 흘렀다. 이제 노년에 접어든 조각은 마음과 달리 빠르게 쇠해가는 몸의 변화를 눈치 채면서 퇴직의 시간이 가까워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늦게, 이제와서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스스로 여기지만, 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도 눈물도 없을 전문 킬러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자그마한 평화가 지켜지기를 원했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무 위험도 없었을 그 평화는, 그러나 그녀 자신이 뿌린 씨앗으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에 처한다. 업계에 몸 담은지 40년이 지났으니 그녀 손에 죽어간 사람이 오죽 많았겠는가. 게 중에는 그렇게 저세상 간 사람의 유가족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그녀처럼 킬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렇게, 노쇠해서 사그라지는 그녀에게 젊디 젊은 킬러가 복수의 칼을 품고 다가오는 것이다. 조각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먼 시간 속의 일을 근거로.

무척 흥미로운 소재다. 킬러가 등장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은데 그 킬러가 65세 할머니다. 나이는 65세고 아직은 젊은 사람 못지 않은 근육을 자랑하지만, 얼굴 주름만 보면 열살은 더 늙어보이는 쇠잔한 몸의 노인이 주인공이다.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갖지 않던 이 할머니가 버려진 개를 한마리 주워왔다. 개 역시 늙어있었고 누가 먼저 죽을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다. 서로의 육체가 쇠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지하는 모습이 짠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냉장고 안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버린 과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파과破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 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222쪽


문장을 끊지 않고 한페이지 전부를 사용할 만큼 길게 늘여놓았다. 의도한 만연체겠지만, 그래도 독자는 읽기에 피곤했다. 특히 첫 장면의 지하철 진상 노인에 대한 묘사는 초반부터 읽는 사람을 엄청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심히 앉아 있다가 일어난 노부인이 킬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작품은 빠른 속도로 독자를 끌어당겼다. 300쪽이 훌쩍 넘는 책인데 다 읽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으로 무언가를 남겼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대답할 거리가 궁색하지만, 적어도 흥미와 재미만은 확실히 챙겼다고  답하겠다. 나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비슷한 소재로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있었지만, 젊고 싱싱한 육신을 가진 배우가 킬러라는 건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중년 여배우가 액션도 소화하면서 킬러로 나온다면... 와우... 무척 신선할 것이다. 김해숙 씨 같은 배우라면 어떨까. 액션은... 무리일까? 그렇다고 은교처럼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하고 찍는 건 어쩐지 사기 같아서 별로고...


그녀의 이름처럼 손톱에 대한 이야기가 몇 번 나왔다. 상징적인 소재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그러게.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 없고, 둘 모두여도 괜찮다. 시간은 정직하다. 40년 경력의 킬러 할머니에게도, 사람에게 된통 데여버린 나에게도.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평하게 주어진 건 오직 시간 뿐. 당신의 한시간과 나의 한시간이 같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걸 어떻게 쓰는가는 각자의 몫. 분노가 치밀어 오르던 밤 내 옆에는 소설 한권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킬러가 등장하는 소설. 내 감정을 비추어볼 때, 적절한 선택이었다. 다시 골라 보겠다. 내게는 破瓜가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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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0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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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