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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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 기준으로 평범선에 도달했을 때. 화장이라도 해봐요, 바로 미모의 작가로 등극해요. 사람들이 잘 몰라요. 미모의 지름길이 성형이 아니라 작가 데뷔라는 걸. 등단과 동시에 외모 비판 전면 금지권을 획득하거든요. 바람직한 사회죠. 하하하.-43쪽

"나는 개천에서 용만 샀지 개천을 다 산 게 아닙니다."
아내는 고부관계를 판매자와 구매자로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아내는 나를 산 대금을 어머니에게 일년간 나누어 갚은 것이다. 그런데 판 어머니는 아무래도 값이 부족하다 하고, 산 아내는 그만하면 적정가격이라고 맞선 상황이었다.
"아드님 데려가세요."
환불이다. 어머니는 시어머니라는 절대권력을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그런 권력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격을 거두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얻은 권력을 보존하지 못하고 함부로 후두른 죄다. 가만히 있었으면 평생 콩고물 묻힌 떡을 받아먹었을 텐데 욕심내다 떡은커녕 고물조차 못 얻어먹게 생긴 것이다. 여태 먹은 떡에 웃돈까지 얹어 토해내야 할 판이었다.
"그깟 돈 몇푼에......"
"그깟 돈 모아보셨습니까?"-50쪽

하하하. 실제 십만부가 나가도 서울에 작은 전세방조차 마련하기 힘들다. 소설가에게 십만부는 그런 것이다. 심정적 부담은 돼도 한번쯤은 가뿐하게 밟고 가고 싶은 고지.
"우리는 시인이 아닌 걸 하늘에 감사해야 해. 시 쓰는 도욱선배는 만부만 나가면 당장 천문대를 살 거래."
"평론 하는 전소희는 천부만 나가도 나로호를 쏠 수 있지 않을까?"-77쪽

"밥 먹어야지."
"간장게장이요."
(...)
영재의 좋은 점이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삼겹살, 꽃게튀김, 참치, 막국수, 홍어회무침...... 즉각적이다. 꽃게튀김과 홍어회무침은 식당을 수소문해야 했지만 대책 없이 아무거나 찾는 것보다 나았다.-77쪽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해주세요."
"상상."
"독자는요?"
"지상."
"미래의 문단 후배는요?"
"음...... 비상. 다음에는 문단에서 봅시다. 하하하."-79쪽

"형은 글 안 썼으면 뭐 했을 것 같아?"
"글쎄, 뭐라도 하고 있겠지. 넌?"
"난 선장하고 매일 싸우는 일등항해사가 됐을 거 같아. 재주는 있어서 배에 태우기는 하는데, 영 말을 안 들어먹어서 골치 아픈 항해사. 하하하하."
출렁이는 바다가 좋은데 뱃멀미가 심해 배를 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부둣가로 가서 출항하는 배들을 한동안 바라보고 온다고. 거친 사내들이 거친 바다를 무사히 건너는 건 바다를 섬세하고 부드럽게 대하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폭풍과 싸우는 건 바다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바다와 함께 살기 위한 간절한 애원이다. 도하는 바다를 유유히 가르는 사람들을 보면 바다가 그들을 허락한 느낌이 들어 부럽다고 했다. -89쪽

싫은 것에 초연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가. 어릴 때 밟은 압정도 기억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잊나.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운 정마저 가지 않았다. 싫은 것도 관심이라는 말, 나는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악의에 찬 관심은 혐오다. 너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관심은 살기다. 싫다면서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좋아하는 거 아냐? 오, 당신 현자시여. 조롱 뛰는 심장에 단검이 꽂히기를. 싫다면 싫은 줄 아는 게 낫다. 굳이 미련이나 긍정적인 관심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싫어서 죽을 수도 있고, 싫어서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내가 환영으로 나타나면 그래서 미안했다. 너무 싫어해서.-99쪽

사람을 죽이는 게, 사람이 죽는 게 너무 쉬웠다. 잠시 여기 있던 사람이 저기로 간 것처럼. 죽음은 그것으로부터 구해내려는 자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에게만 어려웠다.-101쪽

술에 폭우에 몸도 이기지 못하던 아버지가 형을 불렀다. 따뜻하면서도 안쓰러움이 실린 목소리였따. 아버지는 늘 형을 때렸지만 내게는 친절했다. 마치 옆집 아저씨처럼. 그런데 그 순간 형을 그토록 따뜻하게 부르다니. 서운했나? 그랬던 것 같다. 세상에,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 아니라 함부로 손대면 안되는 장물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형은 만만해서 맞은 게 아니었다.
"이 새끼는 돈도 안되는 게,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형은 돈이 안되는 아들이었기에 맞았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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