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등 할 때 '일', 수재할 때 '수', 그리하여 백.일.수.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일수. 무려 7월 7일에 태어나서 더더더 행운이 겹칠 것만 같았던 일수는, 그러나 엄마의 바람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성적도 딱 중간이었고, 특별한 장기나 재주가 보이질 않았다. 


"일수야, 학교에 가서는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네 생각을 정확하게! 그냥 '몰라요' 하면 바본 줄 알아."
어머니가 신신당부했어요. 일수는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한 생각을 담아,
"모르는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정확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되니까요. 일수는 정직한 아이였어요.- 26쪽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는 아이가 지나치게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 들었다. 그 결과 아이는 모든 걸 '~같아요.'라고 말해 버렸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말은 주술적 힘을 갖고 있어서 늘 말하곤 하는대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고, 그리고 곧 그대로 되어버리는 순환이 이뤄진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일수가 꼭 그래보였다.


"무슨 부로 갈지 정했니?"
"못 정한 것 같아요."
"휴...... 그놈의 같아요...... 일수는 그럼 서예부로 가라. 지원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말했어요.
"네."
일수는 드디어, '같아요'를 빼고 대답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꼬치꼬치 묻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죠. 특별한 게 없는 일수는 그렇게 특별활동부에 들어갔어요. -40쪽


그렇게,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가게 된 서예부에서 일수는 모처럼 생기 있게 변했다. 일수를 잘 모르는 서예부 선생님은 지나치게 날뛰고 시끄러운 아이들 틈에서 얌전하고 침착한 일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서예와 궁합이 잘 맞아 보였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늘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채 중간만 차지하던 일수가 모처럼 칭찬을 듣게 되었다. 일수는 서예반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비록 실력은 달마다 좋아지진 않았지만 계절이 바뀌면서는 조금씩 나아졌다. 일수가 아주아주 특별한 아이여서 언제고 돈방석에 앉혀줄 거라고 굳게 믿고 계신 엄마는 일수를 명필 학원에 보내버린다. 일수네 문방구 이름이 '새마을 문고'이고, 명필 학원 원장님이 말한마디 잘못했다가 크게 고생한 것을 보면 시대적 배경이 짐작 가능했다. 


명필은 어느 날 '태극기가 촌스럽다'고 말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한 탓이었죠.

명필 서예학원 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합니다. 원장은 산신령 같은 차림으로 밤에 산에 올라갑니다. 신분을 속이려고 위장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장에는 그가 쓴 '붓글씨 암호'가 버려져 있습니다. 태극기가 촌스럽다는 말로, 신성한 국기를 모독했습니다. -54쪽


그런데 저거 우리가 알던 그 시절 맞나? 요즘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 같은 섬뜩한 분위기!!


일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백수가 되었다. 사회성이 많이 부족하고 기계 공포증마저 있는 아이가 공고를 졸업했으니 자격증 하나 변변한 게 없다. 이발병으로 갔지만 가위 들고서 사고를 쳤고, 취사병으로 가서는 미각이 둔해서 조리사 자격증을 따지 못했다. 엄마의 한산한 문방구에서 파리를 쫓는 게 일수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문방구 벽에 걸린 저 액자 밑에서 일수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엄마는 저 문구 그대로 '하면 된다'고 여전히 믿고 계시다. 일수가 자신을 돈방석에 앉혀줄만큼 성공할 그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유은실 작가님은 특유의 유머와 넉살을 이용해서 슬플 법한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능청스럽게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뜻밖의 반전이 시작된다. 



어른이 쓴 글자로 보이지 않는, 좀처럼 '명필' 소리 듣기 힘든 일수의 글씨체가 도리어 빛을 볼 사건이 생겼다. 


일수 씨는 그 후로도 가훈을 써서 돈을 벌었어요.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본부' 회장이 교육구청장이 된 덕분이었죠. 학교에선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우리 집 가훈은 내 손으로' 캠페인을 앞 다투어 벌였어요. 이 학교가 끝나면 저 학교가, 6학년이 졸업하면 새로 들어오는 1학년이 가훈을 필요로 했어요. -99쪽


학부모들은 아이가 쓴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가훈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일수의 대단하지 않은 글자는 바로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도저히 어른이 썼다고 믿어지지 않는, 아이가 쓴 것 같은 느낌의 글씨는 학부모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일수 엄마가 정말로 돈을 넣은 방석에 앉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돈방석이란 게 별거 있나. 방석 안에 돈 넣었으면 돈방석이지...


말의 힘이 크다고 앞서 말했다. 일수 엄마도 그 효과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하면 된다'라는 각오 아래 아들의 성공을 굳게 믿었던 엄마! 그 엄마의 바람대로 일수는 성공적인 가훈업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집의 가훈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일수의 인생을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일수가 생각하는 자기집 가훈은 무엇인지, 마음에 담고 싶은 가르침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차례다. 바로 그 기회가 일수에게도 찾아왔다. 자신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인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 말이다. 


120쪽이 조금 넘는 짧은 이야기이다. 일공일삼 눈높이에 맞게 쉽게 쓰여졌지만 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볍지만은 않다. 유은실 작가의 전작들에 비하면 독자의 연령대를 낮추어서인지 묵직한 메시지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함께 잡고 있다. 


~했어요 라는 어투가 무척 자연스럽게 자리해서 구연동화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이 말투 그대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동도 갖게 했다. 늘 '특별'한 것만 강요당하고 집착하는 우리들을 한번 돌아보게도 한다. 일수 씨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일, 바로 나를 찾아보는 일이 아닐까. 


그나저나 우리집 가훈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아부지가 알려주신 우리집 가훈은 '화목'이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그리고 엄청 소중한 두글자라는 것을, 크리스마스 아침 날 깊게 새겼다. 정말, 화목해서 마음이 부자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살아야지. 그래야 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3-12-26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6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7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8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