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10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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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나일론은 질기면서도 탄성이 좋아서 스타킹뿐 아니라 옷이나 양탄자 등을 만들 때도 쓰이고 플라스틱 장난감을 만들 때도 쓰여. 가전제품,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여러 분야의 부품들로도 활용되고 있지.
한때 나일론은 부패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환경에 해로운 섬유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인기가 주춤하기도 했어. 하지만 1998년에 나일론을 분해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환경 문제를 풀 가능성이 생긴 데다 오늘날에는 열에 강한 성질 덕에 항공 산업 같은 분야의 첨단 소재로도 쓰이면서 여전히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지.
- 158쪽

현대 사회에서 최초의 비키니는 1946년에 만들어졌어. 프랑스의 발명가이자 디자이너인 루이 레아르가 파격적인 스타일의 여성용 수영복을 고안해 냈지. 그는 이 수영복의 이름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하던 차에 얼마 전 있었던 미군의 공개 핵 실험을 떠올렸어. 남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그런 무서운 실험을 하는 바람에 온 세상의 이목이 그 섬에 쏠려 있었거든. 그래서 섬의 이름을 수영복 상표로 삼았던 거야.
- 163쪽

비키니 섬이 무인도였냐고? 아니었어, 처음에는. 167명의 주민이 버젓이 살던 섬이었어. 하지만 섬 주민들은 1946년 3월 6일 고향을 떠나 이웃 산호섬을 쫓겨 가야 했지. 미군이 비키니 사람들에게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야. 그 이후 1946년 7월 1일부터 비키니 섬에서 원폭 실험이 시작돼. 왜 하필 이 아름다운 섬에 떨어뜨릴 생각을 했던 걸까? 산호초로 둘러싸인 넓은 호수가 수심이 깊지 않은 정박지를 제공해 주는 데다 주위 섬들을 보급 기지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 대체로 맑은 비키니 섬의 날씨도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지. 비키니 환초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고 비행기와 선박이 다니는 항로에서도 멀리 떨어진 장소였기 때문에 원폭 실험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점이라 생각했던가 봐.
- 165쪽

비키니 섬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나서, 폭탄을 떨어뜨리기 사흘 전에 이 섬으로 동물들을 끌고 왔대. 염소며 돼지, 기니피그 등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원폭 표적이 되는 함대의 일부 선박에 실렸다는 거야. 실험 대상이 된 것은 동물들만이 아니었어. 교차로 작전에 참여한 군인들은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알지 못한 채 폭발 직후 방사능 수치가 위험 수준에 다다를 때까지 최대한 폭발 지점에 가깝게 다가가라는 명령을 받은 경우도 있었대. 무려 버섯구름의 궤적을 따라 이동하라고 명령받은 비행기도 있었어. 7월 1일에 첫 실험이, 7월 25일에 두 번째 실험이 이루어졌어. 예정되어 있던 세 번째 실험은 방사능 오염이 염려된 나머지 철회되었지. 그러나 두 차례의 폭발만으로도 비키니 섬은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보여 주는 역사적 증거라는 이유로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어.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진 이 공개 핵 실험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실험이 시행된 시기가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두 번의 민간인 폭격으로부터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은 때라는 점이야. 그러고 나서 1958년까지 핵 실험이 23차례나 이어졌어- 167쪽

유럽에서는 1945년 4월쯤 전쟁이 끝났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어. 1945년 7월 26일 미국은 동맹국들과 회동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는데 역시나 일본은 거부했지. 그래서 미국 군부는 일본 본토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일본에 있는 여러 도시 가운데 히로시마가 목표가 된 이유는 그곳에 일본의 군수 산업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해. 하지만 그 외에도 그곳이 아직 폭격을 받지 않은 평화로운 도시이기 때문에 핵폭탄의 위력을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고 하니, 전쟁 중의 냉혈한 이성이 소름 끼칠 정도야.
- 168쪽

원자 폭탄의 개발은 미국 정부가 ‘맨해튼 계획’이라는 것으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시작되었어. 맨 처음에는 1942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시작했는데, 그 대학이 있는 곳이 맨해튼이어서 ‘맨해튼 계획’이라는 암호명이 붙었다고 해. 1942년 미국 뉴멕시코 주의 로스앨러모스라는 곳에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연구소가 세워졌고, 3년의 연구 끝에 이 신무기가 개발된 거야. 이 계획은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에 대응하기 위해 원자 폭탄 개발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됐고,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책임을 맡았어. 처음에는 독일이 먼저 개발하게 될 경우를 우려해서 시작했지만, 결국 사용한 쪽은 미국이었지. 나중에 원자 폭탄의 해악을 깨달은 두 과학자는 이후 반핵 운동에 참여하게 된단다.
- 170쪽

1942년 12월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세계 최초로 연쇄 핵 반응을 실현해 냄으로써 원자 폭탄의 폭발을 위한 에너지를 얻게 되었지. 그리고 1945년 7월 16일, 폭발 실험이 성공했어.
- 171쪽

선동가 매카시의 거짓말 때문에 현대판 마녀사냥이 시작됐어. 수백 명이 투옥되고 정부나 공공 기관에서 일하던 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해고되었지. 오펜하이머 역시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었어. 1950년대 초는 소련이 무기 경쟁에서 미국을 앞지르기 시작하던 때야. 매카시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소련이 이제까지의 핵폭탄보다 더 위협적인 무기인 수소 폭탄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미국도 수소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본 거야. 그렇지만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참여를 거부했어.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를 보고 깨달았거든. 평화를 위한 폭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야.
- 173쪽

‘신사’라고 하면 멋쟁이 영국 신사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런 정장 스타일이 자리잡는 데는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했던 영국의 왕 에드워드 8세(윈저 공)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구나. 그는 넥타이 하나를 매더라도 맵시 있고 멋지게 보여서 그 방법이 크게 유행했지. ‘윈저 매듭’이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야.
- 181쪽

일본에는 이와쿠라라는 사절단이 있었어. 이와쿠라 도모미 특명 전권 대사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 사절단이라고 불렀는데, 1871년 말부터 1873년 가을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한 행정가들과 학자들 수십 명이 유학생을 데리고 서양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일본을 근대화된 국가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지. 이와쿠라 사절단은 미국을 거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등 유럽 곳곳을 여행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집트, 싱가포르 등도 방문했어.
-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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