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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 린의 아기
필립 클로델 지음, 정혜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무척 잔잔하게 시작한 소설이었다. 전쟁이 났고, 그래서 난민이 되어 이방인의 자격으로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 무슈 린. 어린 손녀딸을 품에 꼭 안고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은 것처럼 행동하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그가 떠나온 나라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도착한 나라는 프랑스로 보인다. 그가 겨우 배운 한마디 인사가 불어였으니까.
등장인물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가 산책길에 매일 마주친 한 남자가 어느새 친구가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벗이 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친구를 위해서 합숙소에서 얻은 담배를 모아두는 무슈 린. 그 담배를 전해 받고 가슴이 벅차올라 감동을 어쩌지 못한 바르크 씨. 그리고 무슈 린의 과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지켜지는 손녀 상디유와, 사람들의 무관심과 조소 등이 간간이 양념처럼 뿌려졌다.
합숙소에서 처소가 옮겨졌는데, 그곳은 수용소나 혹은 병원의 성격이 강했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무슈 린은 친구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시설을 탈출하는 모험을 강행했고, 지금도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울 바르크 씨를 만나기 위해 사막을 걷듯 도심을 가로지른다.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이면서 도달하는 그 여정이 안타깝게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친구,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무슈 린의 진실.
이 책의 제목이 왜 무슈 린의 '아기'인지 궁금했다. 작품의 말미에 가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소리가 나오면서 더 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렇게 쓸쓸하고, 이렇게 허무하고, 이렇게 아픈 진실이라니......
무슈 린의 머리는 피로와 고통에 절고 환멸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많은 혼란과 너무 잦은 떠남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산다는 게 무언가? 자신이 살면서 받은 상처들을 목걸이처럼 엮어 차고 다니는 게 인생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점점 약해지고 상처받기만 하는데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미 충분히 힘겹건만 어째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힘들고 쓰라려야 한단 말인가? -118쪽
길지 않은 내용의 소설인데, 명확하지 않고 뜬구름 잡듯 몽환적이면서 희미한 느낌의 글인데도 여운이 깊었다. 인용한 글에서처럼 무슈 린이 느끼는 피곤함과 혼란이 잘 전해졌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두 남자의 우정은 아름다웠으며, 그렇게 빗나가면서도 서로를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소통이 근사했다. 작품의 느낌을 잘 살린 번역도 훌륭했다. 필립 클로델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