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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벤트 ㅣ 높새바람 24
유은실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일흔 아홉, 딱 죽기 좋다던 나이라 하셨던 할아버지. 한 해 전에는 일흔 여덟, 딱 죽기 좋은 나이라고 역시 말하셨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방 쓰던 손자 영욱이더러 손 꼭 잡아달라던 할아버지. 곧 죽을 것 같다며 자식 손주들 모두 몇 차례나 집합 시켰다가 양치기 소년이 된 할아버지는, 정작 당신 가실 때 모두들 와보라고 연락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편 들어주던 손자 영욱이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영욱이도 할아버지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다. 그저 체기가 있을 거라고 여겼고, 습관처럼 많이 드시던 활명수, 3병 사달라는 것 한병만 사다 드린 게 못내 미안하기만 하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사고뭉치였다. 젊어서는 성격 나쁜 남편이었고, 사기도 많이 당해서 자식들 고생도 많이 시켰다. 할머니는 고모가 시집가자마자 이혼을 요구하셨고, 일본 남자와 재혼을 해서 일본 땅으로 가셨다. 사기로 집까지 날린 할아버지를 아버지가 모셔왔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싫어했다. 자신이 어려서 미워하던 그 아버지의 모습으로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모른 채.
식구들은 얼굴 가득 검버섯 덮인 할아버지 얼굴을 불편해해서 같이 밥먹는 것도 피했고, 할아버지 냄새 심하다고 역시 꺼려 했다. 축농증이 있는 영욱이는 할아버지 냄새 따위 상관 없이 할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냈다. 무섭고 싫은 아빠한테는 존댓말을 써도 할아버지와는 반말을 사용했다. 친밀감의 표시였다. 할아버지 검버섯 핀 얼굴을 보물찾기로 상상하고, 할아버지 벗겨진 이마를 만지며 잠드는 버릇도 있었다.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할아버지였고, 바탕화면도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역시 할아버지였다.
어린 영욱이는 할아버지와 십수년을 알고 지냈지만 다른 식구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겪었다. 영욱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월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족이라고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가족이기에 더 힘든 은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얽혀진 실타래를 할아버지는 풀고 가고 싶어하셨다. 그렇게 해서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 그러나 이 엉뚱한 이벤트가 유족들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영욱이로서는 할아버지의 유언인데 왜 안 지키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아버지의 진심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그만큼 드물었던 것이다.
작품은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에도, 또 장례식장에 계실 때에도 시종 진지함과 유머의 경계를 잘 지켰다. 뻔뻔한 밉상 스타일의 진상 어른을 잘 표현한 큰 고모부와 여성 호르몬이 많을 것 같은 작은 고모부의 대조와 큰 고모와 작은 고모의 성격 차이가 보이고, 또 엄마와 큰 고모-그러니까 며느리와 딸의 신경전도 볼 만 했다. 뿐인가. 장례식장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서 문화와 정서, 그리고 사람을 모두 보여주었다. 언제나 재미를 주지만 그 속에 늘 사람이 있고 감동이 있던 유은실 작가님 솜씨다웠다.
할아버지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배웅한 영욱이, 그리고 그 영욱이가 마지막에 발견한 할아버지와의 추억과 선물은 끝까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영욱이에겐 그 노래가, 그 하얀 쪽배와 토끼가 오래오래 곁에 머물 것이다. 서로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 더 큰 이벤트가 있을까.
하필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남겨준 문자 메시지는 '치사한 표영욱ㅠㅠ'이었다. 활명수 3병 대신 1병만 사서 그리 되었다. 마지막 메시지일 줄 알았더라면, 또 마지막 심부름이 될 줄 알았더라면 당연히 그러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이별 앞에 준비되지 않은 인사는 허망한 흔적을 남겨버렸다. 할아버지 떠나보내며 받을 수 없는 긴 메시지를 남기는 영욱이를 보며 역시 같이 울었다. 나도 그랬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보낼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눈물 상자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 속 할아버지와 우리 아빠는 닮았다. 여기 할아버지처럼 사고를 치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무시 당하고 대접받지 못하셨다. 나하고만 친하게 지낸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더, 이 책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오래 남아야겠다는, 당연하고도 늘 생각해오던 결론에 또 도달한다. 그리고 평소에 잘하자!란 다짐도 또 해본다.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기 어려울 때 후회하지 말고. 서로에게 늘 반가운, 그래서 이벤트 같은 사람도 되어보자고 또 생각해 본다. 적어도 누구에게는 꼭 '좋은 사람'으로 남기를... 이 책의 큰 고모부 같은 뻔뻔하고 욕심사나운 어른으로는 늙지 말아야지. 불끈!
우리 할아버지는 옛날에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할아버지를 미워합니다. 나한테도 언제나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아빠.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한테 말합니다. "넌 진짜 좋은 애야." 할아버지도 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사우나에 갈 때도, 만화책 빌리러 갈 때도, 박물관에 갈 때도 언제나 이벤트라고 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준비한 마지막 이벤트가 시작됩니다. -뒷표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