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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기차 - 2009년 라가치 상 뉴호라이즌(New Horizons Award) 부문 수상작 ㅣ 뜨인돌 그림책 29
사키 글, 알바 마리나 리베라 그림, 김미선 옮김 / 뜨인돌어린이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찌는 듯한 오후, 기차의 객실 안은 찜통 속처럼 더웠고, 다음 역까지는 무려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객실 안에는 한 부인이 소녀와 그보다 어린 소년, 가장 어린 듯 보이는 여자아이 셋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일행이 아닌 한 신사가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객실 안을 멋대로 휘젓고 다녔고, 여인은 애들을 단속하느라 끊임없이 "안 돼!"를 외쳤다.
그러면 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왜요?"라고 대꾸했다.
좁은 객실을 운동장처럼 쓰며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재밌게 묘사했다. 그럴수록 교양미를 강조하지만 신경질적인 부인의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이러다가 폭발하겠네...
부인은 아이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이것저것 창밖 풍경을 지목하지만 거기엔 별다를 게 없다.
게다가 애들은 사소하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자꾸 던진다.
부인의 표정은 뭐랄까.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그런 표정?
기껏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이야기는 재미난 게 아니라 아주 지루하기만 했다.
게다가 '착한 아이'여서 무사히 위기를 탈출한 이야기는 더 싫기만 하다.
아이는 아까 불렀던 노래를 재차 불렀고, 신사는 마침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인정했다.
부인의 지루한 이야기를 덮을 새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신사가 꺼낸 이야기는 베르타라는 이름의 '엄청나게' 착한 아이 이야기이다.
또 '착한' 아이 이야기라는 사실에 아이들은 벌써 시큰둥.
들어봤자 빤하다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남자 아이는 눈동자가 돌아갔고, 제일 어린 여자아이는 고개마저 돌렸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반전이 있다.
베르타는 그냥 착한 게 아니라 '심하게' 착하기 때문이다.
심하게 착한 아이? 착해서 좋은 게 아니라 착해서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오, 관심이 가는 걸?
베르타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옷을 더럽히는 일도 없고, 음식도 깔끔하게 먹고, 공부도 잘해서 남들의 모범이 되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어른들 입장에서 완벽하게 '모범'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베르타는 메달을 세 개나 받았다. 말 잘 듣는 상, 공부 잘하는 상, 그리고 바른생활 상이었다.
소녀는 그것들을 늘 자랑스럽게 옷에 걸고 다녔고, 걸을 때마다 메달이 서로 부딪히면서 찰강찰강 소리를 냈다.
마을에서 메달을 세 개씩이나 받은 아이는 없었고, 마을에서 이 소녀를 모르는 이도 없었다.
착한 걸로 소문난 이 소녀는 그 바람에 왕자님의 궁전 정원까지 초대를 받았다.
그야말로 착한 것 하나로 일약 신데렐라가 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중간중간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데, 그때마다 신사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도 않고 더 흥미진진하게 내용을 꾸려간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든가, 아니면 임기응변이 아주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여간, 왕자님의 놀라운 정원은 꽃 대신 돼지로 가득했다. 아, 정말 대단한 설정이다.
장미꽃이 가득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돼지라니!
비록 돼지들이 모두 먹어치워서 꽃은 없었지만 왕자님의 정원에는 신기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베르타는 자신이 착한 덕분에 이 모든 것들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며 콧대가 한창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돼지를 잡아먹으려고 늑대 한 마리가 정원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베르타는 불행하게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고 새하얀 앞치마를 입은 베르타는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
늑대는 늘 먹던 돼지 대신 새 사냥감을 향해 입맛을 다셨을 것이다.
어떻게 왕자님의 궁에 위험하게 늑대가 들어오는지,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베르타는 죽도록 달렸고 풀숲에 숨어서 늑대의 눈을 피했다.
그렇지만 오들오들 떠는 바람에 목에 걸린 메달이 소리를 내고 말았다.
베르타는 자신이 심하게 착한 바람에 타게 되었던 그 메달 덕분에 늑대에게 희생된 것이다.
착한 것도 소용 없는, 착해서 오히려 망하게 된 놀라운 이야기!!!
아이들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열광했고, 부인은 교육적이지 않은 내용이라며 떨더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이 악동들을 10분 간 조용히 만든 것은 사실이니 신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나저나 이야기의 큰 재미를 느낀 아이들이 앞으로도 부인에게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원할 텐데, 저 부인은 이제 뒷감당을 어찌 할지 걱정스럽다. 이야기 선생 하나 초빙해야 할 듯!
'착한' 아이가 늘 주인공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착한 게 당연히 좋은 것고 옳은 거였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착하다'라는 표현은 어리숙하고 멍청하고 그래서 남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으로 대치되어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상냥하게 굴지도 말고 도와주지도 말라고 가르쳐야 할 만큼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혹은 믿어 왔던 가치와 다른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걸 채우는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고, 더 많은 경험을 요구하지만, 적어도 그런 판단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다양한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착한 아이가 착해서 저리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나쁘게 살아라~가 아니라, 지나치게 착한 것만 강조하며 살게 한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런데 또 부모 입장에서는 소위 '착한' 아이, 키우기 편한 아이를 바라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수업 시간에 장난치고 떠드는 아이가 곤란한 것처럼...
이야기거리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재미난 책이다. 옆으로 긴 그림책의 판형도 재밌고, 다채로운 표정의 그림도 익살맞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전에 죽은 작가의 오래된 그림책이 지금도 즐겁게 읽히는 것이 참 좋다. 동 작가의 다른 책은 없는지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