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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ㅣ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웹툰 연재작을 인터넷으로 잘 보지 않는다. 기다리는 게 힘이 들어서라기보다, 책으로 읽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웹으로 먼저 읽고 책으로 다시 복습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대체로 책 나온 다음에 보게 됐던 것 같다. 미생이 출간되고 나서 하나씩 모았는데 금세 4권까지 나왔다.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출간해서 그런 모양.
제목이 독특했다. 미생(未生)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뭔가 철학적인 제목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있는지 어떤 내용인지도 전혀 모른 채, '이끼'의 그 느낌만으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책 장을 펼쳤는데 오오옷! 전혀 예상 밖의 소재가 등장했다. 바둑이다!
작품은 특이하게도 '해설'부터 시작된다. 세기의 대국. 바로 1988년부터 89년에 걸쳐 치뤄진 응씨배가 출발점! 중국 본토 출신의 대만 재벌 잉창치가 전 세계의 고수 16명을 초대해 실력 대결을 펼쳤다. 상금 규모만 115만 달러이고,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 당시 윔블던 테니스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고 한다. 일본은 막부 시대에 명인 자리를 놓고 가문의 흥망을 건 혈전을 전개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바둑을 장려했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바둑을 핍박하기도 했지만 바둑 종주국의 자존심을 걸고 대회에 임했다. 이에 비해 바둑 변방에 해당했던 한국은 조훈현 9단 딱 한 사람만 초대되었다. 그런데 그 조훈현이 결승에 올랐다. 5판 3승제의 시합에서 조훈현은 1국을 이겼으나 2국과 3국에서 연패했다. 상대는 중국의 녜웨이핑. 결승전 4,5국은 몇 달 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4국에서 눈앞의 승리를 앞두고 자신의 승리를 의심한 녜웨이핑이 지고 말았다. 이 패배는 네웨이핑을 혼돈에 빠져들게 했다. 중국 전역의 기대와 덩샤오핑의 총애, 40만 달러의 상금 등 그 모든 것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밤새 자책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그와 달리 지옥 입구에서 살아 돌아온 조훈현은 부인과 함께 주최 측이 제공한 관광 일정을 태연히 소화했다. 이것이 제1회 응씨배 결승 최종국(5국)이 열리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등장인물 소개! 우와아, 이거 뭐지? 놀라웠다. 저 엄청난 결과를 앞두고서 작품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버렸다. 궁금한 독자는 재빨리 검색해 보았다. 결과는 조훈현의 승리!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으로 돌아왔다.
주인공 장그래. 어려서 신동 소리 들어가며 바둑 학원을 다니던 아이. 프로가 되기 위해서 십여년 세월을 보냈건만, 애석하게도 프로 입단에 실패했다. 그제야 비로소 주름진 아버지가 보였고, 총기 잃은 눈빛의 어머니가 보였다. 이제껏 바둑 외 다른 세상을 몰랐던 그에게 세상이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감당 못할 규모와 강도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집을 줄여 변두리로 이사를 했다. 작은 식당을 차렸지만 실패했고, 검정고시를 치른 후 후견인의 제안으로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러나 바둑 두던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를 점점 압박해왔다. 결국 첫 회사는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소개 받아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바둑의 그림자를 철저히 숨겼다. 그 덕분에 장그래의 이력서는 빈칸만 남아 있고, 대학졸업장과 특기사항 하나 없으니 뭇 사람들의 시선과 낙하산 의혹을 감당해야 했다.
자, 여기가 시작점이다. 바둑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아이가, 바둑판을 떠나 세상에 발을 디밀었다. 첫발자국은 바로 미끌어졌지만 조심스레 두번째 발자국을 떼고 있다. 작품은 각 장과 장의 연결을 저렇게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검은돌 흰돌을 따라가며 진행시킨다. 승부의 마지막까지 이 속도로 따라가면 엄청난 긴장감이 누적될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비루한 독자는 바둑을 둘 줄 모른다. 초딩 시절 친구한테 살짝 배웠는데 친구도 제대로 둘 줄 아는 게 아니어서 오목도 아닌 게 바둑도 아닌 게 이상한 잡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게 맞다. 해설이 따라 붙지만 전혀 못 알아먹겠다. 바둑 용어도 내겐 너무 낯설다. 애석하다. 당장이라도 바둑 배우고 싶다. 바둑판이랑 바둑알은 집에 있는데....;;;;
인턴 직원들은 몇 주 후 있을 P.T를 위해 파트너를 정해야 했다. 어리숙하고 맥아리 없는 장그래는 모두가 노리는 파트너 감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폭탄 취급 받은 것이다. 동료 인턴 안영이는 판 안의 사람만 모르고, 판 밖의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언질을 주었다. 바둑판 입장에서 그린 구도가 '판 안'과 '판 밖'을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저기 치이고 이용당하는 것만 같아 상심한 찰나에 접근해 온 인턴 한석율. 이번 판은 본인이 선수를 치겠다고 멋있게 폼을 잡아봤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고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장그래. 이둘의 기싸움을 바둑에 기대어 표현한 게 무척 인상적이다. 아주 잘 어울렸달까. 초반에 엄청 끌려다녔던 장그래가 회심의 반격을 가할 때 무척 짜릿해졌다. 비록 입단에는 실패했지만, 그래서 패잔병으로 분류되어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승부사로 길러진 사람이다. '집중력'도 무시할 수 없고 승부욕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판을 보고 형세를 뒤집기 위해서 발톱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그림 무척 멋있게 보이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앞서 여러 프로 기사들의 이름이 나왔는데 이름 배열로 보면 이세돌로 짐작된다. 궁금해서 사진 검색해 봤는데 같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이 그림의 주인공 누군가요??
바둑만화로 보이지만 또 직장인 만화다. 그 둘을 결합시켰다. 바둑도 전장, 직장도 전쟁터.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더군다나 사회성 별로 없는 장그래라는 인물이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개척해가며 살아남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회사의 부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인턴까지, 모두들 참 치열하게 살아간다. 제 인생의 무게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작품 시작 전에 앞서 소개된 작가의 말이 묵직했다.
IMF는 이 땅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국가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은행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해고가 경영합리화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과거 아버지들이 정년퇴임 이후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젊은 날을 회한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게 해주었던 평생직장이란 개념도 없애버렸습니다.
거대한 기업들이 쪼개지거나 사라졌습니다. 노숙자를 더 이상 거지라고 부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지배할 것만 같았던 산업화의 논리는 가치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한국말을 떼기도 전에 영어를 배우게 하고 집은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 되었습니다.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무거운 몸을 밖으로 내쫓습니다. 보다 넓은 아파트를 궁리하고 더 나아 보이는 동네를 꿈꿉니다. TV에서는 꿈대로 살라고 외치는 미담자들이 득세합니다. 꿈대로 못 사는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쳐서 평가받습니다. -5쪽
저렇게 살벌한 경쟁의 시간을 사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삶과 달리 바둑은 매우 특별한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마주 앉아 왜 이기고 졌는지를 나눈다고. 그것도 빠르면 6,7세의 어린이부터 말이다. 그들에게 패배란 어떤 의미인지, 또 패배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지는지...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한 수 한 수 걸음을 옮기는 이야기가 바로 '미생'이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그러나 분명 아직 죽은 것도 아닌 생. 장그래를 점점 더 응원하게 된다. 크게 역전을 시켜주어도 좋겠지만, 이대로 끝까지 가주기만 해도 위로가 될 것만 같은 기분. 미생, 끝까지 같이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