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끝별의 밥시 이야기
정끝별 지음, 금동원 그림 / 마음의숲 / 2007년 11월
품절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라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32쪽

십오 촉 - 최종천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필라멘트
이백이십짜리 전구를 백십에 꽂아 놓은 듯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떨어지지 않는
십오 촉의 긴장이 홍시를 켜 놓았다
그걸 따 먹고 싶은
홍시 같은 꼬마들의 얼굴도 커져 있다
-48쪽

식욕이란 얼마나 자극적이고 강한 것인지요. 누군가는 음식 영상을 보며 "아, 저건 정말 포르노야!"라고 했다지요. ‘따 먹고 싶은’ 유혹과, ‘따 먹지 못하는’ 무능과, ‘따 먹어서는 안되’는 금기가 마찰하고 있는 발열 상태의 욕망! 저 홍시와, 홍등과 정육점과 입술과 심장과 교회의 십자가까지가 모두 환한 꽃등 빛깔을 띠고 있는 이유, 알 만합니다!
-51쪽

밥 -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106쪽

낮달 -권대웅

삶은 너무 정면이어서 낯설었지요
목에 미어 넘어가는 찬밥처럼
숭고하고도 눈물났지요
그림자를 휘적거리며 전봇대처럼 외로웠지요
슬픔도 오래되면
영혼이 밝아진다구요
생은 박하사탕 같아서
그렇게 시리고 환했지요
-108쪽

추억은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몽한다 - 김소연

추억은 짐승의 생살
추억은 가장 든든한 육식
추억은 가장 겸손한 육체
추억은 추억하는 자를 날마다 계몽한다

추억은 실재보다 더 피냄새가 난다
추억은 도살장
추억은 정육점
붉게 점등한 채
싱싱한 살점을 냉동보관한다
어느 부위 하나 버릴 게 없구나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라
-172쪽

식탁은 지구다 - 이문재

식탁은 지구다

중국서 자란 고추
미국 농부가 키운 콩
이란 땅에서 영근 석류
포르투갈에서 선적한 토마토
적도를 넘어온 호주산 쇠고기
식탁은 지구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고추며 콩
석류와 토마토
모두 어디에서
나는 줄 알고 있었다
닭과 돼지도 앞마당서 잡았다
삼십여 년 전
우리 집 둥근 밥상은
우리 마을이었다

이 음식 어디서 오셨는가
식탁 위에 문명의 전부가 올라오는 지금
나는 식구들과 기도 올리지 못한다
이 먹을거리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키웠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탓이다
뭇 생명들 올라와 있는 아침이다
문명 전부가 개입해 있는 식탁이다

식탁이 미래다
식탁에서 안심할 수 있다면
식탁에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날이 새날이다
그날부터 새날이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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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5 0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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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5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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