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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볼
유준재 글.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중매로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대문야구장에서 세 번 데이트하고 결혼을 했다고 했다. 야구 좋아하는 아버지가 떠올릴 수 있는 데이트 장소 중에는 그곳이 최고였을 것이다. 이제는 추억의 뒤편으로 사라진...
많은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아버지 역시 늘 바쁘셨다. 일찍 출근하시고 늦게 퇴근하시던 아버지. 그러나 작품 속의 아버지는 무척 자상하고 가정적인 분이셨다. 모처럼 쉬는 날에는 집 안 구석구석을 손보고, 아이들의 손에 망가진 것들을 수리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말씀 없고 묵묵히 일을 하시는 모습들이 전형적인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나름의 표현은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야구를 시청할 때!
유난히 말씀이 많아지는 때가 바로 야구 중계 시간이었다. 경기 규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비롯, 야구에 관해서 아버지는 만능 박사셨다. 아이가 '우주소년 아톰'보다 아버지와 야구 경기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는 사실이 흐뭇하다. 아이에게 자리한 아버지의 자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천하무적의 아톰보다 더 힘세고, 뭐든 해낼 것 같은 아버지상이 보인다. 어린 아이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큰 존재였을 것이다.
검정색 미즈노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오셨을 때, 아이는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뻤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 이름이 새겨진 근사한 글러브라니!
일요일이면 집 앞 작은 마당이 야구장이 되었다. 형은 타자, 아이는 투수, 아버지는 포수 겸 감독!
아버지는 훌륭한 감독이 되어 몸으로 직접 아이와 땀흘리며 야구의 세계를 가르치셨다.
그 안에서 아이는 목표로 잡은 공을 따라잡고, 제 몫으로 지켜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협동으로 해내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저절로 새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추억을 쌓았고, 땀과 함께 훌륭한 교훈도 보여주셨다. 가끔 남의 집 유리창을 깬다든지 곤란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추억일 것이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는 좀 들었겠지만!
그렇게 땀흘리고 나서 3부자가 함께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마셨던 바나나 우유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의 넘버 원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프로야구가 탄생하고, 저마다 지지하고 응원하는 팀들이 생겼다. 지역 연고가 있을 수도 있고, 작품 속 아이처럼 순수하게 유니폼이 멋있어서 응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선수가 아주 잘 생겼다든지!!
그리고 그해 가을 한국 시리즈에서 베어스와 라이온즈가 운명처럼 맞붙었을 때,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장에 가셨다. 그날에 울려퍼졌던 함성과 홈런볼의 격정어린 감격까지, 모두 아이의 세포에 하나하나 새겨졌다. 그날 만들어낸 기억의 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이는 자라면서 잊었을 것이다. 더 나이 들고, 아버지 어깨의 짐이 자신에게도 올려졌을 때,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마이볼'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순간이 되어서야 되살아 날 기억의 유산들!
순박하면서 토속적인 느낌이 나는 거친 그림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인 구성도, 색감도... 다만 이야기를 끌어냄에 있어서 마무리는 조금 아쉽긴 하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느낌은 알겠는데, 어린이 독자에게는 그 은유의 맛이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함께 시간을 보내었던 소중한 순간들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아이는 빨리 자라고, 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빨리 늙으셨을 테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뿌린 소중한 자산들이 아이에게서 분명 자라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이라는 양분을 듬뿍 빨아들였을 테니... 그리고 그것들이 되물림 된다. 아이의 아이에게로, 또 그 다음 세대로...
이런 이야기 구조는 '불화' 속의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로도 갈 수 있고, 이렇게 무의식 속에 전해지는 사랑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 아무튼 간에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이의 모습이 벅차다. 본인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흡사해지는 부자의 모습. 어머니와 딸로 비유하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엄마와 대화하다가 유독 아빠 생각이 많이 났던 날인데, 그런 날에 이 책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작품 속 아이만큼의 추억은 없지만, 나도 아빠랑 오목 두고 장기 두었던 기억은 있다. 그 정도가 다지만, 그런 추억이라도 내게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아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