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 항우와 유방 - 제국의 붕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2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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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고대사만 전설이 넘쳐나는 건 아니어서, 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 등 서양 고대사 역시 예언과 징조로 가득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텍스트를 낯설게 느끼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다. 반면 이미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초한지>를 우리는 충분히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한니발과 항우가 동시대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깜빡깜빡 잊는다. 우리 머릿속에서 한니발은 먼 옛날 사람이지만 항우나 유방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4쪽

당시 긴 칼은 귀족이 차고 다니는 것이어서 서민인 한신이 칼을 차고 다녔으므로 놀림을 받았던 것 같다.

-19쪽

<사기> ‘항우본기’에는, 진나라가 멸망시킨 여섯 나라 중 초나라 사람들이 제일 억울해하였다고 한다. 진승, 항량, 항우, 유방 등 반군의 주요 인물들은 초나라 출신이다.

-21쪽

진나라가 망할 당시에는 말 위에서 긴 창과 긴 칼을 휘두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아직 등자가 보급되지 않았고, 칼도 크게 단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1쪽

진승이 왕 노릇을 한 것은 고작 6개월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의 멸망은 결국 진승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마천은 진승의 전기를 열전(列傳)이 아닌 왕과 제후의 전기인 세가(世家)로 분류하였다.

-35쪽

초나라 문화는 화려하고 판타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쪽

봉(鳳)새는 초나라 지역에서 특히 사랑받던 상상 동물이다.

-57쪽

옛날 동아시아 사람들은 옥에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60쪽

긴 자루를 가로질러 ㄱ자 모양으로 날을 이은 무기가 과이고, 그 앞에 창날을 하나 더 꽂은 것이 극이다.

-72쪽

어린 임금은 항량이 범증의 건의를 받고 세운 초회왕의 손자 미심이다. 초회왕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의식하여 어린 임금도 초회왕이라 불렀다.

-77쪽

‘막둥이’는 유계다. ‘계(季)’는 막내아들을 부르는 말. 그 아버지는 역사서에 ‘태공(太公)’이라 소개되지만, 그 역시 동네 영감을 일컫는 말이다. 즉 이름도 갖지 못할 정도의 신분이다. 당시 농민군에는 이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78쪽

장함의 항복 이후 호해는 조고를 문책하였고, 조고는 처형될까 두려워 "이제 사태가 급박해지자 책임을 우리 가문에게 떠넘기려 한다"며 정변을 꾸몄다.(‘진시황본기’) 호해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바보가 아님을 보여 준다.

-109쪽

아방궁은 진시황제 생전에 완공되지 않았고 황제는 바빠서 향락을 즐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우주와 천하를 모방해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아방궁은 세계의 미니어처인 셈인데 주술적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111쪽

어린 임금 의제의 죽음에 대해 <사기>의 ‘항우본기’ ‘고조본기’ ‘경포열전’에 기록된 세부사항이 조금씩 다르다. 증거가 남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대에도 후세에도 항우가 암살 배후라는 주장이 의심받은 일은 없었다. 먼 훗날 조선에서 김종직이 몰래 ‘조의제문’을 지어 단종과 세조를 의제와 항우에 빗대었다. 40년 후 1498년에 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의제의 일은 그때까지도 핫이슈였던 셈이다.

-140쪽

팽성전투에 이어 형양전투에서도 패배하자 유계는 한신의 병부를 훔친다. 병부는 열쇠와 자물쇠처럼, 명령권자와 일선 지휘관이 각각 지니다가 맞추어 보는 도구다. 부(符)를 맞춘다(合)는 것에서, 부합(符合)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163쪽

명나라 모곤은 "한신의… 전략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 기묘하여 적과 혈전을 벌인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혈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은 그가 항상 신병을 데리고 싸워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74쪽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세 세력이 솥 발처럼 웅거하면 어느 쪽도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삼분의 계책은 제갈량의 것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노숙이었고, 그 기원은 괴철과 무섭까지 올라간다. 한나라 때는 한무제 유철의 이름과 겹치지 않게 하려고 괴통이라고 불렀다.

-183쪽

‘패왕별희’라는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가 소개된 문헌은 <사기> ‘항우본기’다. 그런데 여기에는 항우의 부인 우미인이 자결하였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자치통감>에는 아예 ‘패왕별희’의 장면조차 누락되어 있다.

-192쪽

유계는 이름도 없는 미천한 신분이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에야 우리에게도 친숙한 유방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최고 권력자인 그를 이름으로 부를 사람은 없었다.(미치지 않고서야)

-198쪽

‘존왕’의 왕은 주왕을 뜻한다. ‘양이’는 ‘이(夷)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이때 ‘이’는 초나라다. 옛 기록에 초나라 군주는 ‘초자’라 일컬었다. 초의 자작(子爵)이라는 뜻이다. 당시 중원 제후국들의 작위는 대개 공, 후, 백이었으므로 초자는 초나라를 하대한 칭호였다. 초의 군주였던 웅통은 주의 왕에게 자신의 작위를 높여달라고 요구했다가 들어주지 않자 스스로 무왕이라 칭해버렸다. 당시 ‘왕’은 주나라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였다. 이후 초는 대대로 왕호를 칭하며 중심의 질서에 도전했다. 장강 연안의 풍요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여 팽창해가던 초의 신장세는 대단했다. ‘존왕양이’는 초라는 강력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211쪽

초나라 지역은 거대한 장강과 수많은 지류, 안개와 비가 많은 습윤하고 온난한 기후 등의 자연 조건으로 인해 북방처럼 노동 집약적 집단 농업 경제 및 강력한 중앙 집중형 권력이 출현하기 어려웠다. 또한 물의 유연함, 거대한 대자연에 대한 경외가 뿌리 깊었다. 사회 속의 인간관계, 문화와 규율의 법칙성을 중시하는 유교가 북방의 고대 문화를 대표한다면, 인위에 대한 자연의 우위와 기존 질서를 초월한 자유로운 해방을 추구했던 도가 사상은 남방의 사유였다.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도 장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유가와 도가 사상은 음양의 관계로 중국 문화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 산수의 아름다움에 대한 침잠과 찬탄이 결여된 중국 예술은 상상하기 어렵다. 남방, 즉 초라는 타자로 인해 중국 문명은 그 거대한 풍요를 획득할 수 있었다.

-212쪽

유방이 세운 제국의 이름인 한(漢)은 원래 지명이다. 한은 한수(漢水)라는 장강의 한 지류를 가리키는 한자인데, 이 한수의 중상류 유역이 한중이다. 유방은 패(沛) 출신이다. 패는 원래 송(宋)나라 땅이었다가 송이 멸망한 뒤 초나라에 편입된다. 또한 거병 후 줄곧 초 항우의 휘하였으므로 그는 엄연히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사건을 계기로 유방의 아이덴티티는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213쪽

한중은 유방과 항우의 근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외부로부터 격절된 궁벽한 산골이 아니었다. 험한 길이긴 하여도 관중 및 촉 등 주변 지역과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으며, 한중 분지와 사천 분지는 온난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농업 생산력도 높았다. 또한 혜문왕 이래로 진(秦)에 속하여 왔던 진나라의 고지(故地)다. 한중의 왕이 된 후 유방 집단의 성격은 크게 변모한다. 한중 시절 유방 집단은 군사 및 행정 부문에서 진나라의 시스템을 적극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패 지역의 토착적 군사 집단에 불과했던 유방 집단은 전국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였다. 이에 반해 항우는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고도 다시 초나라라는 지역성으로 회귀해버렸다. 바로 이 점이 초한쟁패에서 유방과 항우의 운명을 갈랐다. 유방이 한왕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으되, 그가 건립한 대제국이 한(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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